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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고독한 대화 : 제로(0), 무한(∞)...》

추상의 패러다임이 통째로 집어삼킨 하나의 단면을 여전히 응시하며...

by 우주에부는바람

“... 감각이 언어를 지나치게 압도하고 억압할 때 감각은 언어의 저항과 반발을 다 통제할 수 없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시인의 감각이 직관적 통찰과 사유가 겸비된 조화적 감각일 때 언어는 웃으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p.28, <011. 미시적 물질세계> 중)


책을 읽는 나는 나의 정중앙을 향해 나를 타고 달린다. 채찍을 휘두르면서 당근을 심는다. 이미 늦었다. 뿌리고 거두는 전 과정은 이미 예습되었으므로 건너뛴다. 비로소 현실이 된 것들을 외면한다. 박차를 가하고 박차에 찍혀 만신창이가 된다. 추상의 패러다임이 통째로 집어삼킨 하나의 단면을 훌쩍 뛰어넘는다. 공간을 외면한 기하학의 세계에서는 많은 것들이 가능하고 그만큼 많은 것들이 소외된다.


“... 시인의 육체는 언제나 백색의 침묵으로 텅 비어 있고 검은 음악으로 꽉 차 있는 비탄의 시다. 검은 눈망울이 별빛을 내며 떠다니는 무한의 우주다.” (p.33, <014. 음악은 산소다> 중)


시인의 산문에는 시산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시인의 시집을 읽어보지 못했고, 대신 다른 이의 산문에서 뽈랑 공원이라는 그의 시집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다. 시인은 수학과 출신이다. 책의 부제에 ‘제로(0)’ ‘무한(∞)’이라는 단어가 명시되어 있다. 다만 그 뒤에 ‘눈사람’이 따라 붙는다. 산문집의 중반부에 그리고 곳곳에 수학의 개념어가 등장한다. 매트릭스 속에서 흘러 다니는 녹색 코드를 보는 것처럼 보게 된다.


“... 나에게 추상은 관념의 차원에 귀속되지 않는 물질공간이자 의미의 아름다운 살해가 벌어지는 비극 공간이다.” (p.53, <027. 추상의 탄생> 중)


산문집은 모두 20부로 되어 있다. 207개의 짧은 글과 1개의 희곡 그리고 작가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위로 솟아 있는 거대한 축조물이 아니라 원형으로 축조된 담벼락 같다. 언어를 개어 시인의 틀에 넣고 말려서 만든 벽돌이 재료로 사용되었다. 담벼락을 따라 걷고 걷는다. 나와 담벼락 사이에 세상이 있고, 때로는 담벼락의 그림자가 나를 포획하는 것을 느낀다. 반대로 나의 그림자가 담벼락에 드리우기도 하지만 담벼락은 알지 못한다.


“... 한 그루 나무는 자신의 육체와 허공에 갇혀 있고, 한 편의 시는 말과 여백에 갇혀 있다. 여백은 아름다운 감옥이다. 현대의 시인이라면 여백에 잠든 꿈꾸는 말까지도 탈옥시킬 수 있어야 한다.” (p.96, <동시성 그리고 실종> 중)


확신으로 가득한 추상이란 것이 있나, 싶다. 내게 허용된 감각을 허용하는 사물, 그러니까 책이라는 실재에 드문드문 반발한다. 이율배반은 때론 안하무인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는 때론 길 잃은 미로 설계자의 도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지난한 과정이 때론 허울 좋은 여러 수학 공식들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만 같다. 길은 어디에나 있는데 자꾸 날아오른다.


“... 자연은 그 자체로 전위다. 다만 인간의 눈이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 그것들을 인간의 통념과 질서로 편입해 가두어놓고 있다. 따라서 전위의 실천 방향은 사물의 외부가 아닌 내부, 나의 내부의 감각기관에 대한 근원적 회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는 폭약이 그 무엇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인가.” (pp.247~248, <129. 시인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무한한 것 사이에서, 녹아 없어질 ‘눈사람’이 외롭다.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사이에서 다수의 개념어들이 화약처럼 터진다. 어두운 공간을 응시한다. 기대로 가득한 눈빛이 여러 차례 반짝인다. 시선을 빨아들인 허공이 부풀어 오른다. 길 잃은 바람이 그 안으로 모여든다. 허위의 벽을 따라서 바람이 회오리친다. 출구를 찾아다닌다. 나는 여전히 응시 중이다.


“어떤 예술품을 감상할 때 나는 가능한 한 감각과 본능에 따라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상상하는 편이다. 그와 동시에 내게 전해진 감동과 울림의 세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상 예술품을 정밀하게 해부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내게 글쓰기는 이 두 개의 시스템이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이다. 무의식과 의식이 지속적으로 오가는 길항과 배반의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한없는 자유를 느끼면서도 강력한 억압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글쓰기 자체를 문제시하고 일탈을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쓰면서 글의 소멸을 꿈꾸고, 글의 양이 늘어날수록 글의 최소화를 욕망한다. 극소화된 자아와 언어와 세계의 삼위일체를 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 이처럼 사물이 갖는 시각적 형태를 극소화하려는 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순수 추상 계열의 작가들이다.” (p.439, 작가의 말 중)



함기석 / 고독한 대화 : 제로(0), 무한(∞), 그리고 눈사람 / 난다 / 441쪽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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