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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8. 2024

존 버거 이브 버거 《아내의 빈 방 : 죽음 후에》

사십 년을 함께 살았던 아내가 남겨 놓고 떠난 그 방에서...

  존 버거는 2013년 7월 30일, 사십 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함께 하였던 아내 베벌리 밴크로프트 버거를 떠나 보낸다. 베벌리 버거의 나이 일흔 두 살이었고, 존 버거는 여든 일곱 살이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는 그 해 겨울 열화당 쪽에 자신의 아내를 회고하는 글과 함께 그림을 보낸다. 아마도 존 버거의 에이전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아내 베벌리 버거를 추모하면서 2014년 열화당은 그 글과 그림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현재를 가로지르는 당신의 그 길들을 따라, 당신은 과거에서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당신이 찾는 알 수 없는 미래로 옮겼지. 당신은 그 선택된 유산들을 두 어깨뼈 사이에 멘 아주 가벼운 배낭처럼 지니고 다녔소. 전혀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오. 미래에 대해 말하자면 - 그건 서로 주고받는 눈빛 안에 있는 것이었고.” (p.15)


  나는 아내를 1991년에 처음 만났다. 나는 스물 셋이었고 아내는 스물 한 살이었다. 내가 마흔 여섯이 되던 2014년, 나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했다. 내가 아내를 모르고 살았던 시간이 이십 삼 년이었는데, 이제 내가 아내를 만나고 다시 이십 삼 년이 지난 셈이네. 그러면 이제부터는 아내를 모르고 살았던 시간보다 아내를 알고 살았던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일만 남았을 뿐인 거네. 그리고 삼 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당신이 샤워를 마치고 주방으로 와 조리대 옆의 의자에 앉으면, 나는 가스 풍로 옆에 있는 소켓에 헤어드라이어의 플러그를 꽂고 당신 머리를 말려 주었지. 내가 머리를 다 말려 주고 나면 당신은 머리칼을 뒤로 빗어 넘겼소. 절대 얼굴 옆이나 앞으로는 빗어 내리지 않았지.” (p.21)


  아내가 감기에 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나도 감기에 걸렸다. 아직 감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아내는 끼니마다 입맛이 없다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비 오는 수요일 집회를 앞두고 서로를 걱정했다. 단단히 옷깃을 여미고 외출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비싼 곽 휴지를 샀다. 아내와 나는 각자의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각자의 볼 일을 보면서 부드러운 휴지로 함께 코감기에 대응했다.


  “점심을 먹고 서류 작업을 계속하기 전에 산책하곤 했던 거 기억나오? 가끔 그쪽으로 걷기도 했잖소. 잠시 걷다가 당신이 말했지. 벤치에서 좀 쉬었다 가요, 라고. 이미, 당신은 그렇게 빨리 지치곤 했지. 특히 북풍이 불어, 돌아오는 길에 바람을 맞으며 걸어야 할 때면... 우린 벤치에 앉았지. 그 벤치엔 뭔가 신기한 구석이 있었소. 엉덩이를 대고 앉는 부분이 너무 높았던 거지. 우리 어른 둘이 앉아도 발끝이 겨우 땅에 닿을 듯 말 듯 했으니까... 거기에 다리를 흔들며 앉아, 이렇게 높게 벤치를 만든 이유가 뭘까 궁금해하며 그 부조화가 재미있어서 웃었지. 아침 여덟시에 거기에 가 본 적은 없으니까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도 가끔 운전을 하며 그 벤치를 지날 때면, 다리를 흔들며 앉아 있는 우리 모습이 보인다오. 마치 영원함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p.25)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이 아내를 모르고 보낸 시간을 추월한 지 오래이다. 나는 어쩌면 나를 바라본 시간보다 몇 갑절 많은 시간, 아내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셈이다. 이제 아내를 타인으로 생각할 수 없다, 정도가 아니라 아내와 나의 의식적인 분리가 힘들어졌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아내가 없다면 나는 아내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떠나보내는 셈이 될 것이다.


  “당신 옷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랑하는 이가 죽은 후에 따라오는 이 질문을, 지금도 셀 수 없이 많은 집에서 하고 있겠지. 대답은 분명하오. 몇 점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주고, 몇 점은 친한 친구나 이웃에게 주고, 몇 점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약간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보관하는 거요... 대답은 분명하지만, 그 질문은, 아무 대답도 허락하지 않는 은밀한 의문처럼 가까운 곳에서 계속 떠오른다오... 당신 옷 몇 점을 이 글에도 걸어 두겠소.” (p.26)


  나와 아내는 1991년에 만났고, 1999년에 결혼하였다. 우리는 그때 이미 반쯤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고, 결혼이라는 제도에는 두 사람 모두 부정적이었다. 결혼을 위해서는 변명 같은 것이 필요했다. 부모님에게 드릴 수 있는 효도 차원의 어떤 선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함께 살 거라면 20세기를 넘기지 말자, 라는 두 가지 엉뚱한 변명의 결과물이우리의 결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2039년까지 함께 하면 우리도 사십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부부가 된다. 나는 일흔 두 살이, 아내는 일흔 살이 될 것이다. 



존 버거, 이브 버거 John Berger, Yves Berger / 김현우 역 / 아내의 빈 방 : 죽음 후에 / 열화당 / 39쪽 / 20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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