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7. 2024

가쿠다 미쓰요, 오카자키 다케시 《아주 오래된 서점》

세월이 흘러 지나간 시간과 생각들이 퍼뜩 떠오르면 나는 또...

  고등학교를 잠실에서 다녔다. 지금은 휘황찬란하게 바뀐 잠실 주공 1단지에 살았고, 그 단지 내의 중앙에 있는 상가에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주말이면 그 서점에서 대학생 누나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말이면 그 서점에서 말도 안 되는 책들을 들춰보고는 했는데, 이를 유심히 살피던 누나는 내게 말도 안 되는 선의를 베풀었다. 원한다면 사지 않아도 되니 책을 빌려갔다가 얌전하고 깨끗하게 읽은 후, 자신이 아르바이르를 하는 주말에 다시 가져 오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생각해보니 나 때문에, 새 책을 파는 그 서점에서는 아주 약간의 헌 책을 팔고 있었던 셈이다.


  “... 이미 만들어진 가치 기준을 존중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무시하고,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헌책도다... 그 헌책도를 전수하기 위해 이제부터 나는 매회 가쿠타 님께 지령을 내리고, 가쿠타 님은 그에 따라 헌책방을 실제로 돌아볼 것이다...” (p.10)


  책은 이제는 유명 소설가가 된 (책을 만들기 위해 헌책방을 순례할 당시에는 아직 그 정도의 명망 있는 소설가는 아니었던, 그러니까 《대안의 그녀》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기 전이었던) 가쿠타 미쓰요가 헌 책을 마냥 사랑하는 자유 기고가인 오카자키 다케시의 명을 받들어 도쿄에 있는 헌책방을 순례한다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책에는 전통적인 헌책방 거리인, 그러니까 우리의 청계천에 해당하는 진보초를 필두로 도쿄 전역에 있는 헌책방들을 차근차근 접수해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사실 나는 초판본의 가치를 잘 모르지만, 이 수행을 시작하고부터 왠지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레스토랑에서 버터맛 따위 판별할 수 없으면서도, “이건 프랑스의 에쉬레 버터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좋은 것 같아서 먹고 싶지도 않은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먹는 느낌과 꼭 닮았다...』 (p.115)


  두 달 전쯤이던가, 이 책을 읽을 무렵 우리 동네에 있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들렀다. 동네에 그런 책방이 있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 때늦은 방문이었다. 평일 낮 손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만큼 외진 곳에 위치한 그 책방은 몇 차례 장소를 이전한 전력이 있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혼란스러운 서울에서 헌책방을 유지하는 일은 아마도 꽤나 눈물겨웠으리라. 몇 권의 책을 구매하였고 주인장과 잠시 대화를 나눴고 일종의 후원회원이랄 수 있는 씨앗 회원에 가입하였다. 책방을 나서면서 높은 가격이 붙어 있던 몇 권의 번역 소설을 떠올렸다. 번역 소설의 초판본이나 재판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나, 잠시 갸우뚱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도 가장 심각한 수준의 무지를 자각한 학생이나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학생, 그후 헌책 마니아가 될 학생들이 이 서점에 훌쩍 들르면 좋겠다. 그리하여 물건이 금방 흘러넘쳤다 사라지는 피상적인 현실과는 달리, 시간이 침전하는 신기하게 고요한 공간을, 그 매력을 알고 어른이 되어가면 좋겠다고, 수행중인 몸이지만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p.119)


  책을 읽는 동안 ‘책방 봄’의 운영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책방 봄’은 헌 책과 새 책을 구분 없이 판다, 한 달에 삼 주는 오픈을 하지만 나머지 한 주 동안은 책의 진열을 변경하는 방식을 취한다, 책방의 운영 위원을 두고 그 운영 위원들이 추천하는 책으로 서가를 채운다, 와 같은... 그리고 책방 봄과 가까운 곳에는 까페 여름과 가을 공방과 겨울 식당이 있는데, 이로써 지구에서의 시간이 완성된다.


  “헌책방을 운영하며 드는 생각 중 하나가, 물건이나 사람의 소멸은 그 자체가 기억이나 기록의 소멸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물건만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고, 또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은 남지 않을까요.” (p.153)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허튼 생각들을 두루 하면서 책을 읽었더니 리뷰를 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래는 ‘책방 봄’의 주인과 독자가 만나는 페이크 르뽀 같은 것을 써보려다 그만두었다. 멀티미디어 소설과 페이크 르뽀 문학(근데 이것이 소설과 뭐가 다르지?)을 비롯하여 재미난 생각들을 잔뜩 하였는데, 잠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재미란 것들이 금세 색이 바랬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문득 이 지나간 시간과 생각들이 퍼뜩 떠오르면 나는 또 재미있어 질 것이다. 헌책방의 발견 혹은 헌책방에서의 발견은 바로 그런 것이리니...



가쿠타 미쓰요, 오카자키 다케시 / 이지수 역 / 아주 오래된 서점 (古本道場) / 문학동네 / 277쪽 / 2017 (2008)



  ps. 책에서 소설가가 들른 도쿄의 헌책방들은 아래와 같다. 하지만 폐점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곳들이 즐비하다. 어디에서든 책방의 운명이란 참...


  진보초 - 미와 책방, 로코 책방, 간토토 문고

  시부야 - 위트레흐트, 핵넷 다이칸야마점(폐점), 플라잉북스

  도쿄역과 긴자 - 야에스 고서관, R.S.Books(폐점), 오쿠무라 서점 온초메점(폐점), 오쿠무라 서점 산초메점(폐점), 간칸도

  와세다 - 고서 겐세이, 이가라시 서점, 히라노 서점, 산라쿠 책방, 안도 서점, 분에이도 서점

  아오야마와 덴엔초후 - 덴엔리브라리아, 고서 니치게쓰도

  니시오기쿠보 - 고고시마야(폐점), 하트랜드(폐점), 오토와칸

  가마쿠라 - 게이린소, 모쿠세이도(폐점), 가마쿠라키네마도, 고코도, 시키 서림(폐점)

  다시 진보초 - 도쿄 고서회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