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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7. 2024

프레데릭 파작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난 실패했어요" 라고 말하였던 어느 예술가의 초상을 따라가다 보면...

  파스칼 키냐르와 프레데릭 파작을 연속으로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프레데릭 파작을 읽은 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중인데,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이 마침 초상화가이다. 프레데릭 파작은 빈세트 반 고흐의, 프레데릭의 파작의 그림이 충분히 덧붙여진 고흐의 일대기와도 같다. 그리고 고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들 중 일부를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그 초상화의 피사체이기도 한 인물이다.


  “빈센트는 풍경에 몰두하지만, 스스로 고백하듯이, 자신이 훨씬 더 능하다고 느끼는 초상화를 선호하는 게 분명하다. 한데 아를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p.164)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태어나다. 엄마(무) 코르넬리아와 아빠(파) 테오도뤼스 사이의 첫째였다. (1년 전 빈센트라는 같은 이름의 태어났지만 6주 만에 죽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년 후 같은 날 태어났다.) 빈센트 아래로 다섯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설교자의 재능이 없는 목사였고, 빈센트 또한 이십대 후반에 신학을 공부하고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이었던 보리나주에서 설교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그때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을 그린다. ‘슬픔’이라는 제목의 초상화에서, 그는 처진 배와 가슴을 드러낸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알몸으로 그녀를 재현한다. 세계의 비차이 이 명철한 시각 속에 요약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건 아니다. 그는 가정을 꾸렸다. 보잘것없는 화가, 창녀, 그리고 두 명의 사생아로 구성된 가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정은 가정이다. 그것도 인류에 대한 그의 시각에 아주 잘 부합하는 가정이다...” (p.106)


  네델란드로 돌아온 고흐는 과부인 사촌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거부당하였고, 집에서도 쫓겨나 동생인 테오가 있는 헤이그에 자리를 잡는다. 그곳에서 매춘부인 신 호르닉을 만나고 그녀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과 가정을 꾸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헤어진다. 벨기에에 있는 미술 학교에 등록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만두었고, 그 사이 일본화에 대한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소설 속 아마도 도모히코가 그린 일본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깎은 갈대 끄트머리로 이 데생 조각에 열심히 반점을 치는 빈센트를 상상해보았다.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어마어마한 기량이 거기에서 엿보였다. 정신착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성 들인 그 데생 속에는 어떤 거대한 평온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소박한 갈대와 약간의 먹물에 기대어, 그는 삼나무며, 올리브나무, 해바라기, 그리고 햇빛이 줄줄 흐르는 푸영 등, 그가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들에 몰두한다. 이것으로 그는 자신의 데생을 완전히 혁신하며, 또한 데생의 그런 혁신은 회화로까지 이어진다. 그 선이 부산하되 단호한 붓의 선을 닮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카마르그의 갈대에서 그저 도구 하나를 새로 발견한 것이 아니요. 그가 배운 크레용과 목탄을 잊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그는 비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린다.” (p.8)


  고흐의 마지막은 아를에서였다. 고흐의 열렬한 그리고 유일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와는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고흐가 추종하다시피 한 고갱의 방문이 있었다. 고흐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창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그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한동안 갇혀 지내야 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고흐는 파리에서 30킬로 떨어진 오베르 쉬로 우아즈 마을로 이동한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가셰 박사의 집 근처이다. 그리고 그곳의 라부 여인숙에서 지내게 되고, 어느 날 삼각대를 들고 나갔다가 자신의 배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1890년 7월 29일, 그의 나이 37세 4개월째에 고흐는 숨을 거두었다. 새벽 한 시 반에 그가 숨을 거뒀을 때 테오는 고흐의 편지를 한 통 발견했다. 


  “글쎄, 내가 해야 하는 일,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고, 그 일로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어 - 그래, 좋아 - 한데 내가 아는 한 너도 장사꾼 부류는 아냐. 그래서 내 생각엔 너도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진정으로 인류와 더불어 행동하면서 말이야.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p.251)


  프레데릭 파작은 2012년 이후 Manifeste incertain, 불확실한 선언 시리즈를 매년 발표하고 있다. 책은 이 시리즈의 다섯 번째 권이다. 앞 날개에 붙은 설명에 따르면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권은 <발터 베냐민의 죽음>이다. (그는 시리즈의 이 책으로 메디치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왠지 그 책을 읽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이번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프레데릭 파작 Frederic Pajak / 김병욱 역 /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전기, 혹은 그를 찾는 여행의 기록 (MANIFESTE INCERTAIN V. Van Gogh, une biographie) / 미래인 / 261쪽 / 20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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