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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8. 2024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양식화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카메라의 발명은 그것이 발명되기 훨씬 이전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본래 그림들은 그 그림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건물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림들은 건물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모든 그림의 독자성은 그림이 걸려 있던 장소가 지닌 독자성의 한 부분이었다. 때로는 그림을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을 두 장소에서 동시에 볼 수는 없었다. 카메라가 어떤 그림을 복제하면, 그 이미지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그 결과 그 이미지의 의미는 변화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미가 여러 가지로 늘어나고 많은 의미들은 조각조각 나누어진다.” (pp.24~25)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는 1972년 방여된 BBC 텔레비전 시리즈 <다른 방식으로 보기>로부터 출발하였다. 존 버거는 이 책이 자신과 스벤 블롬버그, 크리스 폭스, 마이클 딥, 리처드 홀리스가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네 편의 에세이에는 글과 이미지가 함께 사용되고 있고, 나머지 세 편은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 심지어 벽에 걸린 복제물도 이 점에서는 원작을 따라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p.37~38)


  에세이에서는 복제 혹은 복제물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작 혹은 아우라를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발터 벤야민 (혹은 베냐민)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에세이에 등장한 내용들의 연원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에세이의 글들은 카메라에 의하여 복제되는 원작이 아니라 원래의 원작이 가지고 있던 장소 그리고 시대의 아우라까지를 거론한다. 


  “시각예술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보호영역 안에서 존재해 왔다. 본래 그 영역은 신비스럽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 영역은 물질적이기도 했다. 작품은 어떤 장소, 동굴이나 건물 그 안에, 혹은 그곳을 위해 그려졌다. 최초에는 제의(祭儀)의 경험이었던 예술적 경험은 삶의 나머지 부분과는 분리된, 정확하게는 그 나머지 부분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나중에 예술의 보호영역은 사회적인 영역이 된다. 지배계급의 문화 속에 편입되는 사이 물질적으로는 궁전이나 저택 안에 고립되어 따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역사 내내 예술의 권위는 그 보호영역이 가지는 특정한 권위와 분리되지 못했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 혹은 새로운 기술로 복제한 예술 이미지를 -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p.39)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을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러니까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 그리고 작가 혹은 대상의 계급, 뿐만 아니라 작품이 배치되어 있던 장소까지를 더하여 그 작품의 아우라로 바라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존 버거는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유명한 비평가들에 의해 혹은 작가에 의해 고착화된 예술 비평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그림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p.56)


  에세이의 후반부에서는 특히 페미니즘적인 시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술 작품 안에 등장하는 여성 혹은 여성의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니 여성 혹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그 방식이 주로 남성 작가에 의해 표현되었으며 그 표현들이 이번에는 그 그림을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까지를 왜곡시키고 있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미 사십여 년 전에 도달한 문제 의식이었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당신을 관심을 갖고 보지만 당신은 그들을 관심을 갖고 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선망을 덜 받게 될 것이다... 매력적인 인물들의 힘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행복 속에 있다. 바로 이 점이, 광고 속의 그 많은 매력적인 인물들의 시선이 비어 있고 초점이 맞지 않은 듯이 보이는 이유의 설명이 된다. 이들은 그들을 매력의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시선을 무관심하게 관망하는 것이다.” (p.154)


  예술품을 대하는 방식에 대하여 갖게 된 저자들의 문제 의식은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요구된 어떤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미술의 영역이 아니어도 좋겠다)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획기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획기적인 생각은 개개인의 시선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확장된 개개인의 시선이 모든 예술 작품에 또 다른 풍요로운 아우라의 원천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존 버거 John Berger / 최민 역 /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 열화당 / 190쪽 / 2012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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