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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스콧 《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작가가 들렀거나 전설처럼 접한 열 여덟 개의 서점은 너무 멀리만 있지만.

by 우주에부는바람

“... 어느 토요일에 오빠와 함께 동네를 걸을 때였다. 혼스 식료품 가게 밖에 버려진 빈 오렌지 상자가 눈에 띄었다. 가운데에 널찍한 버팀대가 있고, 위에는 오렌지가 화사하게 그려진 얇은 미색 나무로 된 상자였다... 오빠가 가게에 들어가 물어봤고, 우리는 그 상자를 얻었다. 그날 저녁 나는 몇 권 되지 않는 내 책을 상자에 넣었다. 학교 성경책과 빨간색 사전, 《회색 부엉이》《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내 교지들을 낮은 선반에 눕혀서 꽂았다... 그래서 내 첫 책들에서는 늘 오렌지 향이 났다.” (p.9)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의 첫 번째 권이 아닐까. 그러니 내 인생의 첫 번째 책장도 기억날 리가 없다. 오렌지 향이 났을 리도 없다. 내가 어릴 때 오렌지라는 과일은 우리에게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나무였을 것이다. 표면이 거칠었을 수도 있다. 나는 책을 꺼내다가 까칠한 책장 받침대에 손가락이 쓸리고, 거기에 작은 가시가 박혀 안저부절하는 나를 상상한다.


“... 내게 남아 있는 컴펜디엄서점의 자취는 그곳에서 구입한 책만이 아니다. 컴페디엄이라는 장소와 그곳의 사람들을 통해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책을 읽는 사람이 나와는 또다른 세상을 거닐고 있는, 이 서점이라는 곳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공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거리에서 보면 컴펜디엄서점의 유리문은 늘 열려 있었고, 넓은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책들이 보였다...” (p.19)


나를 사로잡은 첫 번째 서점은 80년대 잠실 주공아파트 1단지 상가에 있던 서점이다. 나는 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누나 덕분에, 도서 대여점이 생기기 이전에 그곳에서 책을 빌려볼 수 있었다. 주인이 없는 주말, 나는 책을 돌려주러 서점에 들렀다가 누나의 여동생을 만났다. 그녀와 나는 서울극장에서 나이트메어 시리즈 중 하나를 같이 봤다. 이후 그녀가 무용과를 졸업하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다음까지 연락을 하며 지냈다. 그녀와의 연락이 끊긴지 오년쯤 되었다.


“북스오브원더서점의 빨간 문에는 순금색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서점 바닥은 갑판 같았다. 책들이 사방을 알록달록 물들였다. 발치에도, 머리 위에도, 한복판의 키 큰 흰색 책장 주변에도 책이 내뿜는 기운이 가득했다. 긴 창문 너머로 허드슨 스트리트가 숲처럼 반짝였고, 창문 앞에서는 서점직원이 분주하게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유일한 이방인이다...” (p.112)


내가 다니던 대학 앞에는 이어도라는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다. 선배와 함께 학습할 책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자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신념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곳에서 학과 선배가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나중에는 그 선배가 그곳 서점을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 그곳에 서점은 없다. 골목을 두고 서점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리치몬드 과자점도 프렌차이즈 업체에 밀려나야 하는 형편이었다. 하물며 서점은 진즉 사라졌다.


“내가 케니스서점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언제나 계단 때문이다. 빙글빙글 돌며 각 층을 통과하는 중세풍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주름무늬 카펫이 깔린 맨 꼭대기 층이 나온다. 그곳에 가면 가장 오래되고 희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다. 뉴욕의 고급 로프트처럼 널찍한 이 꼭대기 층의 서남향 창문으로는 항구에서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옛 길을 굽어볼 수 있다...” (p.189)


까페 여름의 후배는 내게 자꾸 책방을 하라고 권유하였다. 나는 그러고 싶다고, 그리고 그럴 수도 있다고 대꾸하였다. 나는 이미 책방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책방 봄’이 그것이다. 까페 여름 출입문 옆의 둥근 테이블에서 함께 하였던 또 다른 선배는 목공을 연마하였는데, 그에게는 ‘가을 공방’이라는 타이틀을 건네기도 하였다. ‘까페 여름’과 ‘책방 봄’ 그리고 ‘가을 공방’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겨울 식당’ 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


“나는 온라인으로 책을 요청하고, 책값을 지불했다. 그랬더니 내가 요청한 책들이 진짜로 왔다. 누구로부터, 누구의 손을 거쳐 왔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또다른 종류의 전설이 될지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도와 응답’의 관계 같기도 하다.” (p.195)


산문집의 제목에 과하게 끌려버렸다. 하지만 그에 합당한 ‘응답’을 받지는 못하였다. 작가가 직접 들렀거나 전설처럼 접한 열 여덟 개의 서점은 너무 멀리 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공간적으로도 그렇다. 대신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나의 ‘책방 봄’을 떠올리는 일에 자꾸 시간을 할애했다. 출입문을 열면 좁고 어두운 통로가 있고, 그곳을 지나서야 갑자기 봄처럼 환한 서가가 펼쳐지는...



앤 스콧 Anne Scott / 강경이 역 / 오래된 빛 : 나만의 서점 (18 BOOKSHOPS) / 알마 / 204쪽 / 20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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