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매무새 고치고 찬물을 들이켜도, 우리들은 계속 끓을 것이니...
*2017년 1월 2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김훈의 문장은 분명 뜨겁지만 팔팔 끓는 모양을 들키지는 않는다. 이것이 그의 많은 장점들 중 하나이다. 이 년 전 《라면을 끓이며》가 출간되었을 때 선뜻 구매하지 못했던 것은, 팔팔 끓다 못해 사방팔방 뜨거운 물이 튈 것만 같은 그 사은품이 마뜩찮아서였다. 더불어 이미 다른 책에 실렸던 글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도 클릭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이제 양은냄비의 열기는 식었고, 그래도 김훈의 문장은 뜨거울 것이니, 늦었지만 읽었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pp.16~17)
그것도 탄핵 정국의 한 가운데에서 읽었다. 두서없이 천갈래 만갈래 날아다니는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역시, 김훈의 뜨거워서 무겁고 무거우면서도 담백한, 그래서 별다른 수사 없이 진실된 문장이야,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이 리얼한 현실이 아니라 지금의 이 리얼한 현실을 앞에 두고 비현실적으로 부유하는 나의 마음을 정돈하고 싶었다. 정돈되어도 여전히 뜨거운 마음이기를 바랬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이것을 벌기 위하여 이것을 넘길 수가 없도록 몸을 부려야 한다면 대체 나는 왜 이것을 이토록 필사적으로 벌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것을 어찌하면 좋은가. 대책은 없는 것이다.” (p.71)
사태가 불거지고도 석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책을 모두 읽고 또 한 달여의 시간이 더 흘렀다. 세상의 혼탁함은 여전하고, 와이퍼를 작동시켜도 또렷해지지 않는 전경을 향하여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 모두들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데, 어떤 이들은 필사적으로 남아 있고자 한다. 시계추에 매달려 용을 쓴대도 거대한 시간의 흐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터인데도 그러고 있다.
“... 물가에 앉은 새들이 사람의 마음에 돋아나는 저녁등불을 바라볼 때, 새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는 풍경에 관하여 나는 말할 수 없다. 끝끝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무서움이 저녁 갯벌에 가득하고, 먼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온 내 짐보따리는 무겁다.” (p.97)
그러느라 해가 바뀌고 또 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동안 눈에 품어본 자연의 풍광이 없다. 되찾은 삼한사온의 추위로 얼어붙었을 따름이다. 어느 눈 오는 새벽, 재개발을 앞둔 공가의 구석에서 느리게 추위를 걸어 다니던 고양이 한 마리, 왕복 6차선 도로를 쏜살같이 횡단하던 족제비 한 마리 발견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날 살아가는 것들이 흰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이 SNS 포토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맞는 봄에 새잎이 돋는다. 봄에는, 몇 번의 봄이 더 남아 있을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봄에는 찰나의 덧없음에 미혹되는 한 미물로서 살아간다. 봄에는, 봄을 바라보는 일 이외에는 다른 짓을 할 시간이 없다...” (p.361)
이 겨울이 더디 가는 것처럼 봄도 더디 오면 어쩌나 싶다. 겨울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처럼 이제 올 봄조차 눈에 담을 여유 갖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그 우려 안에서 김훈의 문장들을 읽었다. 끓어서 튀는 물방울이 아니라 설핏 올라오는 김을 보며 뜨겁겠거니 읽었다. 그렇게 잔뜩 우러난 역사의 한 켠에서 우두커니, 마음의 매무새를 고치며 찬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우리들은 계속 끓을 것이니...
라면을 끓이며 / 김훈 / 문학동네 / 411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