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좌경학생가를 떠올리며, 맞아 좌파들이란...
우리들은~ 좌경학생~ 좌장면 먹고~ 좌전거 타고~~~ 농활을 위해 오른 버스에서였는지 아니면 돌아오는 버스에서였는지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당시 유행하던 노가바 노래였고, 원곡은 ‘이기자 대한건아’라는 일종의 건전한 응원가인데, 우리는 그것을 ‘좌경학생가’로 바꿔 불렀다. 87년 6월 항쟁 이후의 일이다. 그저 ‘좌’라는 음절이 들어간 단어 하나에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 겨우겨우 저물어가던 즈음이었다.
“... 최근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은 불같은 반항이 아니라 ‘무기력’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10년간의 짧은 민주화 경험 이후 이토록 왕성하게 자라난 독재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생각해보면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은 단지 부정선거의 결과만은 아닌 듯싶다. 절반 정도는 독재와 권위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들이 불러들인 재앙이기도 하다.” (p.39)
우리는 그후 좀더 스스럼없이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좌파에 대한 개념이 분명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레닌과 엥겔스를 통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정치 경제를 학습하였고 때때로 신념화하였으며, 그것이 좌파로 일컬어지며 탄압받는 것을 감내하였을 따름이었다. 버젓이 사문화되어 있던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가까스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좌파란 시간을 더디게 흘러가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파는 모든 삶을 속도에 대한 강박 속에 날려버린다. 좌파는 시간을 갖고 삶을 음미하며, 이른바 개발과 발전이라는 강박으로부터 삶을 되찾아오는 싸움을 한다. 또한 좌파는 끊임없이 세상의 구조,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수에 맞서 소수를 대변하며, 지속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일깨우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pp.78~79, 자크 제르베르)
하지만 ‘좌파’라는 단어를 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대가 저물었다는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 짧았던 10년이 지나자 (기원이 어디든) ‘종북 좌파’라는 신조어가 그 다음 십여 년을 가득 채웠다. 집권 여당과 일베와 어버이연합과 종편과 각종 극우단체들은 매우 풍요롭게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 사이 대한민국은 ‘좌경학생가’를 부르며 코웃음을 쳐야 했던 시절로, 아니 그 시절을 거슬러 그 이전 유신의 시대로 회귀했다.
“좌파란 보다 평등하고 보다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로 세상을 변혁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p.190, 브누아 켄더)
급기야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었고 문체부는 이를 활용하였다. ‘종북 좌파’라는 말의 약발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이었을까, 그들은 좌파와 우파라는 구분대신 친정부와 반정부라는 구분법으로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독재 국가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인데, ‘좌파’라거나 ‘종북’이라는 단어는 허울일 뿐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생각을 모두에게 강요하고 싶을 뿐이다.
“좌파란... 세상 모든 일에 즉각적,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 무엇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한 간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줄 아는 사람... 루이즈에게 좌파는 철학적 성찰과 휴머니스트의 인격을 갖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좌파에게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좌파들은 그것을 억울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루이즈의 말을 따르자면 그것은 좌파의 ‘즐겁고도 괴로운’ 숙명이다. 눈치 보면서 대세만 쫓는 이들, 성급한 단견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이들에게 우린 좌파라는 영광(?)스러운 라벨을 붙여주지 않으니, 적어도 좌파로 자임하려면 기꺼이 깊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그 말, 어딘지 낯설지만 충분히 와 닿는다.” (p.206, 루이즈 포르)
사실 리스트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이들의 좌파 구분법은 독재자들의 반대자 구분법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먹거리를 걱정하는 엄마들도 좌파,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부모도 좌파였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좌파가 되었고, 지금도 어떤 이들은 그런 구분법으로 거리에 서기도 한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한줌의 좌파 아닌 자들이 다스리는 거의 완전히 좌경화된 국가인 셈이다.
“나는 좌파가 아닌, 극좌파로 불리기를 원한다. 지금 프랑스에서 좌파라는 말은 사회당 지지자를 뜻하므로, 내게 극좌파란 반자본주의자가 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p.237, 이렌 장)
그리고 오늘 아직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오늘 새벽 전 비서실장 김기춘과 이제 곧 전 문체부 장관이 될 조윤선의 구속이 결정되었다. (엊그제 삼성가의 3세대 오너인 이재용에 대한 구속 영장이 기각되어 겪었던 상실감에 조금 위로가 되었다.) 법치의 가장 윗선에 있었으면서도 그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다른 방식의 통치를 꿈꾸었던 이들을 혁명가로 추켜세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리는 형국이다.
“좌파라고 해도 반감은 없지만 어찌 보면 우파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과거로의 회귀성이 강한 사람이다. 라틴어, 그리스어로 남겨진 유산들을 충분히 섭렵하지 못하고 떠나게 될까봐 조바심이 난다. 동시에 나는 항상 걸어가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규정하고 우파를 적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우파에 장점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찾아서 본받고 싶을 뿐이지 좌파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그들을 적으로 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p.276)
생각해보면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이토록 힘든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모든 이에게 좌파라는 낙인을 찍는 이들이 득세하는 나라, 이 땅의 좌파들은 자신들의 태도나 위치가 아니라 저들의 태도나 위치에 따라 좌표가 달라지는 숙명을 겪어왔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완전히 변태된 한국의 좌파, 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있다 목수정의 《파리의 생활 좌파들》을 읽자니 문득 정신이 들었다. 맞아, 모름지기 좌파들이란...
목수정 / 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 생각정원 / 278쪽 / 2015 (2015)
ps. 책에 실린 15명, 파리의 인터뷰이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여성 노인들의 공동체 ‘바바야가의 집’ 설립자 테레즈 클레르,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거리예술가 에릭 브로시에, 독립 언론 ‘모두를 위한 루브르’ 편집장 베르나르 아스크노프, 칸 영화제 커미셔너이자 갈리마르출판사 소속의 작가 자크 제르베르, 대장장이를 꿈꾸는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 카렐 자닉, 21세의 반자본주의신당 당원 솔렌 페랑도, 파리에서 난민이 된 양심적 병역 거부 청년 이예다, 난민에게 무료로 프랑스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 엠마누엘 갈리엔느, 평생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제2차대전 생존 유대인 사라 달루아, 국정원의 견제를 받는 프랑스-한국친선협회 부회장 브누아 켄더,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영화감독이자 한의사 루이즈 포르, 삶의 터전은 지키려는 초등학교 수위 아저씨 토마 페루아, 중앙정부 관료이자 극좌 정당 활동가 이렌 장(가명), 맨몸으로 가부장제에 맞서는 프랑스 페멘의 활동가 폴린 일리에, 방외인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게바라주의자 심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