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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쓰기의 말들》

돌아보니 흐릿하지만 조금 어색하고 많이 안쓰러운 나의 어떤 행적...

by 우주에부는바람

언제 처음 쓰기 시작했는지, 그러니까 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쓰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글쓰기 숙제라는 것이 있었을 텐데, 그 첫 번째 과제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읽기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남아 있다. 오십 여권으로 구성된 계몽사에서 간행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첫 번째 권, 그러니까 이솝우화가 실린 그 한 권이 내가 읽은 첫 번째 책이었다, 라고 쓰고 나서 이미지를 검색하였더니 그 전집의 첫 번째는 <그리이스 신화>인 듯하다. 아, 너무 흐릿한 사십여 년...


“... 어느 순간이 되자 나는 ‘다른 글’을 쓰고 싶어 몸이 달았다. 내 몸에 투입되는 문장과 내 몸이 산출하는 문장의 간극을 견딜 수 없었다.” (p.13)


내 인생 첫 번째 글쓰기 과제는 아니었을 테지만, 글쓰기 숙제로 처음 떠오르는 것은 위인에 대한 독후감이다. 나는 이 독후감을 써내서 종종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실토하자면 나는 내가 읽은 (또 계몽사에서 간행된) 위인전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아마도 역자 후기와 비슷한) 내용을 적당히 짜깁기 하고, 거기에 약간의 내 생각을 덧붙여 과제를 제출하고는 했다.


“나를 본다.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시기의 글쓰기 욕망은 순했다. 영화나 책 읽기 같은 문화 생활 향유의 후기였다. 쓰면 좋지만 안 써도 무방한 글. 향유의 글쓰기. 내가 글을 부렸다. 생활의 기반이 흔들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p.27)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의 글쓰기는 떠올리기 힘들다. 그 시기 띄엄띄엄 일기를 썼고,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준 적은 있다. 라디오 방송에 엽서를 보내 그것이 읽혔던 경험이 있지만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문학회에 가입했다. 쓰고자 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고, 그 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을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소란스러운 시기였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한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앎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p.51)


그리고 아직도 그 답을 받아들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쓰기를 멈춘 적은 없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러다가 이 오리무중의 글쓰기가 그만 하나의 패턴이 되어버렸다. 아주 능숙한 듯 매번 적어내고 있지만 제대로 돌아보지는 않는다. 아주 가끔 과거의 나를 그러니까 과거의 내가 쓴 글이 아니라 그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돌아보기만 한다.


“문체란,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p.39, 재인용)


그렇게 이 책 《쓰기의 말들》을 읽으며 나의 어떤 행적을 돌아보았다. 조금 어색하고 많이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책에는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아마도 작가가 다른 작가의 글을 읽으며 메모하였을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들 옆에 덧붙인 ‘쓰기의 말들’ 104개가 들어 있다. 그 말들이 너무 멀게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은유 / 쓰기의 말들 / 유유 / 229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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