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되어 반추되고 그 틈으로 골목골목이 이어지고...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는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났고 (실제로는 광주 변두리의 동네에서 태어났으나 이후 그 동네가 광주로 편입된, 60년대를 즈음하여 도시의 변두리에서 태어난 이들이 으레 치렀어야 할 이동으로 인하여...), 전남대학교에서 학부를 다녔고 또 그곳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그렇게 여태 광주에서 살고 있는 평론가 김형중의 광주에 대한 에세이이다.
“글을 쓰려고 작정하자 K는 뭐랄까, 프란츠 파농의 비유를 빌리자면 자신이 등단 후 15년간 ‘광주 피부’에 ‘서울 가면’을 눌러쓰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자의식에 시달리곤 했다. 진지하게 고쳐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광주에 대해 쓸 자격이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이 책에서 그가 일인칭 ‘나’가 아니라 삼인칭 ‘K’로 등장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p.13)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광주에 대해, 광주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못내 조심스럽다. 결국 그는 자신의 에세이의 서술자를 일인칭으로 정하지 못한다. 중앙이 아니라 지방에 적을 둔, 그러나 온전히 지방에 귀속되지 못하고 중앙을 기웃거렸던 혹은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만 같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 산물 같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광주에서 태어나 항쟁과 그 이후를 겪은 이의 강한 자의식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중순의 어느 날은 그보다 더 선명히 기억한다. 기억 속 숫자는 믿을 바 못 된다지만, 당시 K가 들은 바로는 20만이라고들 했다... 훗날 K는 마르쿠제를 읽으면서 그런 감정의 정확한 명칭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에로스 효과eros effect’였다. 합쳐지는 것의 위대함이 K의 몸속에 일종의 ‘획득형질’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K는 사람들이 합쳐지는 장면, 목소리가 더해지는 장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장면을 보면 어김업이 콧날이 시큰해진다. 설사 그것이 <국제시장> 같은 싸구려 휴먼 블록버스터라고 할지라도...... 그게 다 금남로에서 얻은 K의 획득형질이다.“ (p.49)
광주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아니어도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들에게 광주는 조금씩은 그렇다. 오월이면 종종 그곳 망월동으로 향했고 그러지 못한 이들은 각자가 있는 곳에서 광주를 기웃거렸다. 그러니 우리들에게도 약간씩의 ‘획득형질’은 있다. 그리고 K가 말하는 ‘에로스 효과’를 아예 모르지 않는다. (그 ‘획득형질’이 최근 이어지는 광화문의 집회 현장에서 나를 자꾸 울컥거리게 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제 막 그 형질이 획득되는 경험을 하기도 하겠지...)
“... 쌍문동과 양림동이 환기하는 골목 공동체가 너무 뭉클해서, 그에 대해 K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다소 편향적이란 생각이 든다면,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유토피아적 계기가 있는 법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이(프레드릭 제임슨이던가?) 다소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골목은 자주 이상화되곤 하는 기억의 힘을 빌려,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꼴을 추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pp.92~93)
평론가 K를 따라 이제는 광주에 편입된 K의 고향 땅 송정리를 비롯하여 금남로 그리고 도청 자리에 들어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둘러본다. 양림동과 광주극장(올해 초 까페여름의 선후배가 이곳을 다녀왔다), 해태 타이거즈(이제는 기아 타이거즈가 된)의 챔피언스필드와 우치동물원과 대인시장이라는 곳을 어깨 너머로 바라본다. 아마도 대절된 버스의 내부에서 얼핏 바라봤을 수도 있을 장소들이다.
“... 그는 자신이 매일 일하는 밭 한가운데 남편의 묘지를 만든 친척 노인을 알고 있다. 일하다 거기서 쉬고, 거기서 새참을 먹는다. 죽은 자들이 이즈음처럼 외롭고 기괴한 존재가 된 것은 사실 ‘근대’ 이후의 일이다. ‘살아서, 생산하라’. K가 생각하기에 근대화된 한국은 오로지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벙어리에 가깝다.” (pp.198)
그리고 에세이의 마지막 챕터에 들어서면 이제 망월동 묘지가 등장한다. 산 자들이 따랐던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 묘지 너머 영락공원에는 이제 평론가 K의 형과 아버지가 재가 되어 묻혀 있다. 거대한 역사 아래에서의 죽음들과 사적이고 개별적인 죽음들이 나란히 있는 것만 같아 다행이다. 두 가지 죽음들이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역사에게 다행이라 여긴다.
김형중 /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 난다 / 201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