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의 음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 그는 절대로 신문을 읽지 않았다. 또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높은 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반드시 이스라엘 항공을 이용한 것은, 이 항공사는 항공기가 몇 대 안 되기 때문에 정비가 더 잘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비행기도, 어떤 항공사도 이용하지 않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를 물으며 음악을 연주하는 듯하지만 그는 ‘왜?’를 물으며 연주했다... 그는 텔레파시를 믿었으며, 숫자나 우연의 일치 등에 의미를 부여했다... 무대 위에서 9년이라는 이 타락한 세월을 보낸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돈을 버는 가장 편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이 갈망엔 면역이 되지 못했노라고 언젠가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피아노 연주를 위해 종종 신을 벗는다든지 손가락 끝만 나오는 장갑을 끼기도 했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목욕을 할 때도 반드시 장갑을 끼었다. 또 손으로는 아무것도 잡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다른 사람의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은 누가 손을 너무 꽉 쥐었다고 고소를 한 적도 있었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의자는 가족의 일부이며, 바흐보다 더 가까운 친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시를 싫어한 그였지만 대부분의 생을 토론토와 뉴욕에서 보냈다. 또 겨울 한 철을 극권 너머 어두운 땅에서 보내기를 꿈꾸었던 그가 죽음을 맞은 것은 불을 모두 켜둔 채 잠을 자던 토론토의 찌는 듯한 아파트에서였다... 한 피아노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이 업체의 한 직원이 무람없이 자신의 등을 툭 치려 했다고 고소를 하기도 했다. 그는 교체도, 언쟁도, 대안도 좋아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을 때면 자신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늘 아주 창백하고 아주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주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비디오 카메라의 무수한 차가운 눈길은 좋아했다... 그는 글자를 읽기 전에 악보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를 두고 미쳤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광기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pp.50~56)
친구의 (《코케인》이라는) 소설이 아니었다면 ‘굴드’라는 이름이 이렇게 친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괴짜 피아니스트 정도로 알고 있었던 글렌 굴드에 대해 넌지시 알고 있는 (글렌 굴드인지 굴렌 굴드인지 매번 헷갈려 하는) 정도였지만 소설을 읽고 유투브에서 몇 차례 그의 연주를 찾아서 듣고 보았다. 다리가 짧고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피아노 건반을 가슴에 안은 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밤의 기슭에 정지된 한 순간, 한 호텔 방의 정리되지 않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나는 상상해 본다. 밤 속으로 침몰하지 않기 위해 완강히 저항하면서, 절망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 침묵의 순간이 닥치기를 기다리는 그를. 밀물처럼 음향을 쏟아내는 두 대의 라디오와 한 대의 텔레비전이 형성해 놓은 이상한 침묵. 팔다리가 벌어지고 구겨진 시트 위로 손가락들이 별 모양으로 펴진 그의 몸은 기진맥진한 자의 몸이었다. 1964년 3월 29일 일요일 부활절, 시카고에서였다.” (pp.18~19)
많은 장르의 세계 곳곳의 음악을 듣기를 좋아하였지만 클래식 (그리고 재즈에는) 귀를 열지 못하였다. 여태 음악이 낯서니 글렌 굴드의 음악 그리고 글렌 굴드도 낯설다. 천재적이었고 괴팍하였던 그에 대한 전기는 1964년에서 시작된다. 서른두 살 정상급 연주자는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더 이상의 연주회를 갖지 않기로 한다. 그는 스튜디오에서의 음반 녹음,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녹음만을 하기로 한다.
“... 그는 더 이상 이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과 입으로만 들을 줄 아는 이 청중을.” (p.11)
“... 듣기 위해선 말하기를 멈추어야 하며, 음악을 세부까지 온전히 다시 들으려면 연주를 멈추어야 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p.13)
『... 그가 연주회를 반대한 궁극적인 이유는 정신적인 차원에 있었다. “음악은 청중을, 또 연주자를 명상으로 인도해야 한다. 하지만 2천9백99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명상에 잠길 수는 없는 법이다.”』 (p.49)
책을 읽는 동안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들었다. 어두운 스튜디오에서 피아노만을 앞에 두고 예의 그 의자 위에 앉아 웅크린 어깨, 끊임없이 자신의 연주를 따라가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을 바라봤다. 독특하게 하얀 구레나룻과 뿔테 안경, 훤히 드러난 이마를 바라보면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수학자를 떠올렸다. 책을 읽다가 유투브의 음악을 보고 듣다가 다시 책을 읽기를 거듭했다.
“... 오로지 두 손만이 생기에 넘쳐 보일 때가 있다.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물체와 한 가지로 뒤편에 남아 있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이,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을 부여받은 부분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여러 다른 피아니스트들처럼 그 역시 이 손들을 마치 몸에서 분리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처럼 바라보았다. 손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에 속해 있었다.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 (p.76)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악보에 의하면 30개의 변주 다음에 처음 연주한 아리아를 그대로 반복해서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아리아가 처음 것과 아주 다르게 들리는 것은 둘 사이를 가르고 있는 30개의 변주 때문이다.” (p.178)
그의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그에 대한 글과 모니터 안의 그를 바라보았을 때 이질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전적으로 굴드에 대한 글을 쓴 미셸 슈나이더의 공일 수 있다. 작가의 글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천재적이고 괴팍하다. 그는 음악 형식을 글의 형식에 접목시켜 첫부분의 아리아와 마지막 부분의 아리아 그리고 그 사이에 서른 개의 챕터를 배치시켰다. 그 글들을 읽으며 우리는 하나의 음악처럼 글렌 굴드에 대해서 알아가게 된다.
“... 굴드는 밤에 깨어 있는 이들의 예민한 변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미지의 것을 불가해한 것과 혼동하지 않았고, 불확실한 것을 모호한 것과 혼동하지도 않았다.” (p.91)
『굴드는 자신의 개념들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늘 거부했으며, 연주 개론 같은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개념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 첫번째 원칙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특별히 피아노적인 그 무엇도 연주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 (손가락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경우, 그것들은 하나같이 ‘구역질 나는’ 생각들이다.)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이것이 굴드의 미학이다. 시토회 수도자 토마스 머튼의 개념과도 비슷한 후퇴의 미학.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피아노 자신과도 거리를 둘 것. 그는 녹음이 있기 전 며칠 동안 자신의 피아노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피아노는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로 연주한다”고 말했다...』 (p.99)
“굴드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자신과 사물들 사이에,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 두었던 차폐물을 열거하자면 수도 없이 많다. 우선 촉각적으로 감지되는 차폐물: 겹겹이 껴입은 옷, 장갑, 손가락이 나오는 장갑, 목도리, 마스크, 소매 없는 외투, 코트, 모피옷. 청각적 혹은 시각적 차폐물: 그는 전화로만 인터뷰를 허락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비서와도 전화나 글로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들을 아직 만나고 있었을 당시에도 그는 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벽이나 천장 쪽으로 몸을 돌리곤 했다. 그는 아주 멀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고, 비디오 · 텔레비전 · 텔레폰 · 텔레카피 · 텔레파시를 좋아했다.” (p.109)
미셸 슈나이더의 글이 음악적인 것인지 아니면 글렌 굴드의 생애가 음악적이었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전기 작가의 글은 어느 순간 고독해 보인다. 작가는 한없이 글렌 굴드를 향하여 다가가고 있지만 (그는 절대로 글렌 굴드일 수 없으므로, 또한 그는 글렌 굴드를 실제로 대면해보지도 못했으므로) 그럴수록 그가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간극을 감내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떤 이들에겐 고독이 하나 혹은 여러 개의 얼굴-가면일 수도 있지만-을 가졌으며, 어떤 이들에겐 얼굴도 형체도 업는 무엇이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나’가 없으며, 그 말을 들어 줄 상대방도 없다. 설령 착각으로 그가 상대방에게서 독자성을 끌어내더라도 상대방 역시 그런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동공 속에, 말하자면 끝도 없이 떠도는 이 어렴풋한 동공 속에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결핍되어 있는 것’ 이 아니고, ‘아무도 없는 것’ 이다.』 (p.144)
“... 한 사람을 악보를 읽듯이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비밀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는커녕 점점 오그라들고, 더 모호한 상태로 남기만 하는 무엇이 굴드에게는 있었다. 그가 그토록 자주 인터뷰-일정한 주제의, 때론 심오한 내용의-를 허락했던 것은 왜일까? 같은 질문이 늘 되풀이된다는 것을, 답변을 함으로써 더욱 자신을 은폐하게 될 것임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p.176)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하나의 음악으로 글을 읽는 것이 좋다. 하나의 감정선 안에서 멈추지 말고 시작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다. 그것이 글렌 굴드의 생애를 하나의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의 음악으로 들어주기를 바랐던 미셸 슈나이더의 텍스트화 된 연주를 대하는 독자의 올바른 태도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아리아 뒤에 실린 네 개의 글은 (초판 이후 증보판에 실린 네 개의 글이라고 한다) 사족 같아서 아쉽다. 그래도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훌륭하다, ‘글렌 굴드는 음악을 앓고 있었다. 치유될 수 없는 병.’이라는...
미셸 슈나이더 Michel Schneider / 이창실 역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Glenn Gould, piano solo) / 동문선 / 221쪽 / 2002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