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고 아늑하여서 그곳에 있어도 아득하게 그리울 것 같은...
슬로베니아가 그곳에 있는지를 몰랐다. 이탈리아의 북쪽과 맞닿아 있고, 오스트리아의 남쪽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슬로베니아를 저기 어디 옛 소련의 드넓은 지역, 그 변방 즈음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로부터 아드리아 해를 건너면 그리스가 있는 줄 알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탓이려나...) 그러나 이탈리아로부터 아드리아 해를 건너면 유고 연방이 있었고, 슬로베니아는 과거 유고 연방에 속한 지역이다.
“2는 숫자 중에 가장 안정적!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숫자. 다른 숫자를 바닥 위에 세워둔다고 가정하면 1은 똑바로 세우기 힘들고 3은 뒤로 넘어지게 생겼고 4 역시 앞으로 꼬꾸라지게 생겼고 5도 둥근 바닥 때문에 힘들고 6, 7, 8, 9도 역시 혼자 서 있기는 역부족이고. 2는 확연히 다른 숫자와는 차별적!” (p.13)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는 한국인이 열 명 남짓 살고 있는데, 저자는 그중 한 명이다. (음, 여기에 저자의 아내와 딸도 한국인이니까, 그들을 제외하면 일곱 명 정도가 남는 건가...) 여러 편의 소설집과 장편 소설을 낸 바 있는 작가는 그렇게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그곳의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서울에는 서울역이 있지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기차역이 없다. 대신 모스크바 기차역은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모든 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에는 소재지가 아닌 행선지의 이름을 딴 기차역들이 꽤 있다. 그러니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기차역이 없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이 없다.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면 모스크바에 갈 수 있다.” (p.41)
책에는 류블라나와 그 근교 도시의 사진도 여러 장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저자가 녹용(녹색공룡)군이라고 이름붙인 작은 인형이 등장한다. (녹용군의 더 많은 사진은 여기서도 oddyoong.tumblr.com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류블랴나라는 한적한 도시 (류블랴나의 인구는 27만 명 정도이다), 그리고 슬로베니아라는 나라의 (슬로베니아의 인구는 200만 명 정도이다) 또 다른 풍경을 조금씩 보여준다.
“남편 3원칙... 1. 남편은 아내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아내를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 원칙1에 위배되지 않는 한, 남편은 아내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 원칙1,2에 위배되지 않는 한, 남편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아이, 남편 I, Husband’이라는 소설을 제대로 써봐야 할 것 같다.” (p.59)
그리고 한국의 다른 남자들과 비슷하게 딸 바보이고 아내 바보이기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한국으로부터 멀리 혹은 한국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사는 탓인지 아내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아내와 많은 대화를 하고 어딘가에 가 있을 때도 아내와 다시 그곳에 찾아올 순간을 떠올리고 또 실제로 (조금 이른 페이스북일 수도 있었을 아이러브스쿨에서 다시 만난 초등학교 동창인 아내와) 함께 다시 그곳에 들르기도 한다.
“찬카르 선생은 슬로베니아의 대표 문인 중 하나다. 카프카, 조이스 등과 비견되는 것만으로도 그의 문학적 성취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년 하지夏至에 찬카르 봉우리에서 문학상 시상식이 열린다. 산속에서 펼쳐지는 문학 행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문학적이다. 그냥 상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공연과 작가와의 만남도 준비되어 있다.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모닥불을 피우고 축하해주는 것인데, 신성하고도 아름다우면서 원시적인 느낌을 준다. 문학은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주술적이면서 경이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200만 명밖에 쓰지 않는 언어를 위한 문학상이 이렇게 멋져도 되나 싶다.” (p.127)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많으며 동시에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저자의 글은 담백하지만 밋밋하기도 한데, 그래서 ‘아내를 닮은 도시’라는 제목에 어울릴법한 풍성한 감성이 짙지는 않다. 하지만 여러 풍파를 겪으면서도 본모습을 크게 잃지 않고, 조용히 그저 그곳에서 예전처럼 그대로 있는, 평화롭고 아늑하여서 그곳에 있어도 아득하게 그리울 것 같은 도시가 류블랴나, 라고 떠올려지는 걸 보면...
강병융 / 아내를 닮은 도시 / 난다 / 175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