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속이 들여다보여서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치나스키의..
“쉰 살이고, 여자와 잠을 같이 잔 지 4년도 넘었을 때였다. 친구처럼 지내는 여자들도 없었다. 거리건 어디가 되었건 여자를 볼 수 있는 곳에서 마주칠 때면 그 여자들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갈망하는 마음도 없었고 뭘 해도 헛되다는 느낌만 있었다. 정기적으로 자위를 하기는 했지만 여자와 관계를 맺을 생각은 (성적인 관계가 아니라 해도) 꿈에도 없었다. 이전에 같이 살던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여섯 살 난 딸이 있었다. 그 애는 걔 엄마랑 살고 나는 양육비를 댄다. 결혼은 오래전, 서른다섯 살 때 한 적이 있었다. 그 결혼은 2년 반 갔다. 이혼하자고 한 건 아내였다. 사랑에 빠진 건 딱 한 번이었다. 그 여자는 중증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내가 서른여덟 살 때 마흔여덟 살이던 여자다. 아내는 나보다 열두 살 어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내도 지금은 죽은 것 같다. 이혼 후 6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내는 내게 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p.9)
그야말로 개망나니로 이십대와 삼십대를 살았다. 그 사이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 부코스키의 《여자들》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 쓰는 친구를 만났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부코스키의 치나스키처럼 살지 않았을까, 라고 물었더니 결혼을 했어도 대충 그리 살지 않았나,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가 연이어 내게 너무 착해진 거 아냐, 라고 말했고 나는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며 긴 시간 살다보니 그만 착한 사람 비슷한 게 되고 말았어, 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언젠가 수업 중에 부코스키를 읽은 적이 있고, 그 소설을 좋아한 유일한 사람이 자기였다고 말했다. 친구는 여자다.
『... 리디아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아직 살아 있어요?」
「아니.」
「LA 좋아요?」
「제일 좋아하는 도시지.」
「왜 여자를 그런 식으로 써요?」
「어떤 식?」
「알면서.」
「모르겠는데.」
「뭐, 난 당신처럼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면서 글을 쓰는 게 무지 딱하더라.」
대답하지 않았다.』 (p.15)
친구를 만나기 며칠 전 까페 여름에서, 부코스키의 이 책이 정말 마음에 들기는 한데 당신들에게 권하기 애매하여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선배와 후배인 까페 주인 내외에게 실토하였다. 치나스키의 행각 몇 가지를 말하자마자 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후배는 코웃음을 치면서 자신의 남편인 선배는 그런 소설을 절대 읽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또 다른 후배 L은 자신은 재미있어 할 것 같다고 했고, 네가 만약 이 책을 읽고 좋아한다면 뼛속까지 마초라는 네 말을 믿겠어, 라고 답해 주었다. 후배 L은 여자다.
“세실리아는 앉아서 우리가 술 마시는 것을 구경했다. 그녀가 나에게 혐오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기를 먹는다. 종교도 없다. 섹스를 좋아한다. 자연 따위에는 관심 없다. 투표를 해본 적도 없다. 전쟁을 좋아한다. 외부 세계는 지겹다. 야구도 지겹다. 역사도 지루하다. 동물원도 지루하다.” (p.259)
어제 후배 L을 다시 만났는데, L은 지금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그냥 읽는 정도가 아니었다. 짐작하건대 L은 그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남성주의적 시각을 반성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읽은 책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 혐오의 시각을 혐오하기로 다짐한 것 같았다. 후배 L이 부코스키의 《여자들》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 「말을 번드르르하게 잘하시네요, 치나스키.」
「그래야지. 벌써 예순인데.」
「마흔처럼 보여요, 행크」
「당신도 말을 번드르르하게 잘하는데, 라이자.」
「나도 그래야죠. 서른두 살인걸요.」
「당신이 스물두 살이 아니어서 다행이지.」
「당신이 서른두 살이 아니어서 다행이고요.」
「오늘 밤은 참 다행인 밤이군.」
우리는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이자가 물었다.
「난 생각하는 사람이 아냐. 여자는 다 다르지. 기본적으로 여자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의 배합이야. 마술적인 동시에 끔찍하지. 하지만 여자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세요?」
「내가 여자들한테 하는 것보다 여자들이 내게 더 잘하지.」
「그게 공평하다고 생각하세요?」
「공평하진 않지.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더라고.」
「솔직하시네요.」
「그렇지만도 않아.」』 (p.268)
친구를 만나기 전 그리고 선배와 후배를 만나기 전 이십대를 함께 했던 동호회 사람들과 두 차례 연거푸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도 부코스키를 읽는 중이었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고양되어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의 술자리 모두 그때 그 시절처럼 완벽하게 기억을 상실하는 것으로 끝을 봤다, 아니 그러니까 보지 못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 정도였는데, 다음 날 나는 지갑에서 기억을 떠올릴 수 없는 영수증 몇 장을 발견했다.
“... 대체 나는 어떤 쓰레기일까? 분명히 나는 역겹고 비현실적인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동기는 뭘까? 무언가 복수를 하려는 걸까? 이걸 그저 일종의 연구라고, 여성에 대한 단순한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지 별 생각도 없이 일이 벌어지게 놔두고 있었다. 내 이기적인 싸구려 쾌락 이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창녀들보다도 훨씬 나쁘다. 돈만 가져가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매춘부들보다도 저질이다. 여자들이 마치 내 장난감인 양 사람의 삶과 영혼을 어설프게 만지작대고 있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내가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걸까? 나는 지성이 없는 저급한 사드 후작이다. 살인자가 나보다도 훨씬 더 솔직하고 정직할 테지. 아니 강간범보다도 못하다. 그래도 내 영혼이 장난감처럼 취급되거나 비웃음 당하거나 오물 세례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어쨌든 그 정도는 나도 알았다. 정말로 아무짝에도 쓰잘머리가 없다...” (pp.337~338)
아무 (라고 써놓고 나니 왠지 불안하지만)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 라고 지금 이 순간을 자평하지만 문제로 가득하였던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는다. 나는 할 만큼 했고 지금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좀더 해야 한다면 좀더 할 용의도 있고, 반대로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모든 걸 그만두어도 상관없다. 긍정이나 부정, 낙관이나 비관 같은 것에 사로잡히는 편이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다.
“... 나는 작가였다. 더러운 늙다리다. 인간관계는 어쨌든 잘 안 되기 마련이다. 처음 두 주 동안은 전기가 짜르르 흐르지만 그다음에는 양쪽 다 흥미를 잃는다. 가면이 떨어져 나가고 진짜 인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심술쟁이, 저능인, 치매 환자, 복수심이 강한 사람, 사디스트, 살인자. 현대 사회는 그에 걸맞는 특이한 인간 유형을 만들어 냈고 서로를 잡아먹고 산다. 이것은 오물 구덩이에서 벌어지는 죽음과의 결투이다. 나는 인간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최대한의 기간은 고작해야 2년 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p.395~396)
너무 속이 들여다보여서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부코스키의 치나스키를 읽고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내 속도 잠시 들여다봤다.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지금은 주변에 없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떠올렸다. 그러느라 울렁거렸지만 토악질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배출된 오물들에 기억하지지 말아야 할 것들이 섞여 있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렇기는 한데, 그 토악질을 참은 것이 정말 잘한 일이기는 할까...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 박현주 역 / 여자들 (Women) / 열린책들 / 428쪽 / 2012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