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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아니 에르노 《밖의 삶》

배회와 불안, 이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으려 쓰는 삶...

  찾아보니 2018년에 미셀 트루니에의 《외면일기》(2002)를 읽었다. 여기서 ‘외면’은 말 그대로 내면의 반대에 위치한다. 아니 에르노의 ‘밖’이 아마도 ‘외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93년부터 1999년 사이에 쓰인) 《밖의 삶》(2000)의 이전의 기록인 (1985년부터 1992년 사이에 작성된) 《바깥 일기》(1993)도 있다. ‘외면’과 ‘밖’과 ‘바깥’이 사이좋게 기존의 내면의 기록인 ‘일기’에 반기를 들은 셈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그 감각은 밖에서부터, 자라나는 아이들, 떠나가는 이웃들, 늙어 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운전 연수 학원 혹은 텔레비전 수리점이 새로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문 닫은 빵집들로부터. 이제는 프랑프리라는 상호 대신 리데르 프라이스라고 불리는 슈퍼마켓의 구석 자리로 옮겨 간 치즈 매장으로부터.” (pp.18~19)


  페이스북의 피드를 살피다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에서 인용되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옮기자면, “이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따라 움직인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리고 쉽게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라는 문장이다. 걸러진 (?)‘내면’이 아니라 순수한(?) ‘밖’을 보자, 라는 뉘앙스의 책을 이제 막 읽었는데, 다시 ‘내면’이라니... 


  “오늘 몇 분 동안,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마주치는 모든 이를 보려고 애써 봤다. 그 인물들을 꼼꼼히 관찰함으로써, 마치 내가 그들을 만지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그들의 삶이 내게 무척 가까워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런 실험을 쭉 밀고 나간다면, 세계와 나 자신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텐데. 어쩌면 더는 자아라는 게 남지 않을 텐데.” (p.23)


  하지만 언급한 문장에서 ‘내면’을 대신하여 우리가 귀 기울이고 의존하는 외면은 디지털화된 바깥 세상을 의미한다. 아니 에르노(나 미셸 트루니에)가 ‘내면’을 대신하여 시선을 두자고 주창한 ‘밖’과는 또 다른 세상이다. 아니 에르노가 바라보는 ‘밖’은 이미 충분히 걸러진 디지털화된 세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밖’을 향하는 시선의 발원지인 자신의 ‘내면’의 순수성조차 거부한다. 


  “부활절인 오늘 월요일 아침, RER역들에 인적이 끊어졌다. 뇌빌위니베르시테역의 파리행 플랫폼에는 침묵 속에 끌어안은 채 꼼짝 않는 남녀 한 쌍뿐. 세르지행 열차에서는 여자의 등만 보였다. 남자는 여자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자세였다. 열차가 다시 출발할 때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여자는 안경을 꼈다. 여자는 멀리, 앞쪽에 시선을 뒀다. 둘 중 한 명이 타야 할 열차가 곧 도착하겠지. 세상의 종말처럼.” (p.95)


  물론 내게는 ‘내면’이든 ‘외면’이든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이 영 주춤하여 괴로울 뿐이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이동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익명의 사람들을 바라볼 기회가 부쩍 줄었다. 나는 배회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주저앉아 보내고 있다. 육체가 스스로 나서서 프로그램을 따르는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나의 능동적으로 배회하는 사고와는 결이 다르다.  


  “122세 된 여자, 인류의 최연장자인 잔 칼망이 죽었다. 거의 거국적이라고 할 정도의 애도. 그 여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보편적으로 전수할 만한 그 어떤 증언도 남기지 않고 일기 한 권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여자의 유일한 업적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계속된 삶이다. 잔 칼망은 그저 시간, 시간의 화신 그 자체였다.” (p.82)


  다시 한 번 배회하는 신발 끈을 묶어 보아야겠다. 나는 이미 나의 삶이 ‘예상을 뛰어넘는 계속’의 시간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배회하지 못할 것이 없다. 서두를 것도 없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는 불안의 증세들은 불안의 증언들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배회와 불안, 이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일기의 최소한의 기능이다.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정혜용 역 / 밖의 삶 (La Vie extérieure) / 열린책들 / 144쪽 / 20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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