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시라 후배여, 우리는 수다의 빛 아래에서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니..
“... 나로서는 죽음 그 자체는 그리 두렵지 않은 것 같은데, 죽어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고통스럽다...” (p.11)
얼마전 페북에 늙은 후는 두렵지 않으나 늙어가고 있는 현재가 간혹 참혹하다는 글을 올렸다. 비슷한 이야기가 이 나이든 소설가, 정확히 나의 아버지와 동갑인 소설가의 산문집에 실린 것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이에 대해 까페 여름의 후배에게 이야기했다가 오히려 지적을 받았다. 우연찮게 우리들, 그러니까 까페에 모여 수다를 떠는 나와 선배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는데, 그 대화의 거개가 나이듦에 대한 것이라 놀랐다고 했다. 그날은 조금 특별한 경우였고 평상시의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 부러 나이듦을 의식하면서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보다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 변명해 보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당황하였다. (그래서 괜스레 헛웃음이 자꾸 나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먹이기 위해 다른 동물들을 살찌우지, 그리고 인간은 죽어서 / 구더기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 자신을 살찌우는 거야. 살찐 왕과 여윈 거지는 다만 / 한 식탁에 오른 두 쟁반의 요리일 뿐이야.” (p.14, 세익스피어 《햄릿》 중 재인용)
평생 우리의 현대사에 천착하여 소설 작업을 하였던 작가는 (나는 현기영의 여러 소설들 그리고 김석범의 《화산도》를 통해 제주 4.3 항쟁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연에 눈떴다고 고백하고 있다. 친한 이들과 정기적으로 산을 오르면서 나무와 풀의 이름을 익히는 것이 즐겁다고 하였다. 칠십을 넘기고 팔십을 앞두고 있는 이 노작가는 죽음을 앞두고 이제야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가 조만간 들이닥치리라는 걸 알고 있던 트로츠키는 어느 날 창 너머 아름다운 아내 나타샤를 바라보면서 유언장을 썼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당에 있던 나타샤는 방금 창가로 다가와서, 공기가 더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기 위해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나는 마당의 벽을 따라 자라고 있는 밝은 초록빛 풀들과 그 벽 위의 맑게 갠 하늘,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햇빛을 볼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답다. 우리 뒤에 올 세대들이 인생에서 죄악, 억압, 폭력을 말끔히 씻어내어, 인생을 한껏 즐겁게 누릴 수 있기를.” (p.73)
작가는 이제 자연으로의 복속을 꿈꾸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예비한다. 하지만 그것에는 한치의 어둠도 깃들어 있지 않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인생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이 이 트로츠키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한다) 오래전 혁명가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맞춘다. 나이듦, 죽음을 향하고 있는 길이 항상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선악에 대한 판단 주체로서의 능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대기업의 욕구와 의도에 맞게 길들여지고 표준화된 소비자이므로, 대기업이 우리의 사고를 조직하고 표준화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우리의 사고에 크게 관여하고 있지만, 대개는 대기업의 대변자에 불과하다. 이렇게 길들여지고 표준화된 우리의 사고 틀은 선악의 분별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의 도덕적 불감증을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이 사회를 작동하는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방식이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강자만이 선이고 정의인 것으로 호도된다. 착한 강자는 없다. 강함과 선함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다양성의 이름 아래 엄청난 양의 의미들이 범람하고 있는데, 이 현상 또한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무디게 한다. 의미의 포화 상태 속에서 모든 의미는 애매해져버린다. 선악의 구별이 애매해지고, 심지어 뒤바뀌기도 한다. 머릿속에 쥐가 날 지경으로 온갖 일들이, 온갖 의미들이, 온갖 정보들이 폭주하면서 우리의 분별력을 마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다원성과 다양성의 추구는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다양성 절대주의는 옳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악도 존재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p.106)
산문집의 여러 군데에서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특히 위의 부분에서 그랬다. 까페 선배와 뉘엿거리는 햇살에 얼굴 찡그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한탄과 자조가 뒤섞이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옛말에 늙으면 흙내가 고소해진다는 말이 있다. 늙어 흙에 묻힐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인데, 죽음을 두려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고소한 흙내’로서 혼연히 받아들였던 우리 선인들의 넉넉한 풍류가 가슴을 친다. 나도 늙기 시작해서 그런지, 한 1년 전쯤서부터 아스팔트를 벗어나 생흙을 밟고 다니기를 좋아하게 되고, 거기에 자라는 초목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는 더 이상 새 사람을 사귀지 않고, 이왕의 벗들도 전만큼 자주 만나지 않게 되면서, 그 자리를 풀과 나무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p.195)
이십대 초반과 중반을 고스란히 함께 하였던 선배들(이라고 해도 고작 1년 선배들이다)과 종종 까페 여름에서 조우하여 수다를 떨고는 한다. 그리고 아직 흙내가 고소하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그 수다에서 흙내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 아직 저들은 저럴 나이가 아닌데 왜, 라고 의아해했을 후배여 우리의 흙내 나는 수다를 기대하시라, 우리는 그 수다의 빛 아래에서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니...
현기영 /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 다산책방 / 257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