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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종의 기원》

실제 불분명한 절정의 악, 그 기원에 대하여 느슨하게 장르적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집에서 피 냄새를 탐색한다. 신도시의 복층식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는 아래층에서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한다. 간헐적으로 엊저녁 그리고 새벽의 기억들이 떠오르지만 촘촘하지 못하다. ‘유진아’라고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복층 아파트의 이층을 통하여 감행하는 늦은 외출을 엄마는 몰랐다, 아니 몰랐어야 했다.


“... 어머니와 이모가 내 삶을 지배해온 사람들이라면, 약은 그들이 내 인생이라는 풀밭에 풀어놓은 뱀이었다. 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번번이 놈에게 발목을 물어뜯기고 주저앉았다...” (p.133)


(내가 알고 있는) 나 유진은 어린 시절의 발작 이후 약을 먹고 있다. 임자도에서의 첫 번째 발작은 형과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였다. 발작 정신의학자인 이모가 처방하는 약과 그 복용을 지도한 엄마에 의해 나의 발작 상황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영을 그만두어야 했던 두 번째 발작 이후 더 이상의 발작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약을 끊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그리고 때때로 복용을 중단하면서 스스로를 시험하기도 한다.


“... 나는 정말로 발작전구증세를 느꼈는가. 돌이켜보면, 약을 끊을 때마다 매번 발작을 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발작을 일으킨 회수는 두 번에 불과했다. 열여섯 살 때 한 번, 임자도에서 한 번. 혹시 편의에 따라 스스로 믿어버린 건 아닐까. 망각의 이유로 발작이 가장 타당하니까...” (p.192)


정유정의 네 번째 장편 《종의 기원》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 중심에 일인칭의 주인공 나, 유진이 있다. 남편과 큰아들을 잃은 유진의 엄마는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나의 ‘악’을 조절해왔다. 하지만 이제 감춰져 있던 나의 근원은 내가 일으키는 살인들과 함께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실체는 이제 겨우 내게 알려지게 될 뿐이다.


“혜원은 그것이 무엇일지 몰라 겁이 난다고 했다. 처음에는 소아형 품행장애로 추측하고 검사를 시작했는데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토론 결과에 따르면, 유진은 뇌 편도체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아이였다. 먹이사슬로 치자면 포식자... 혜원은 선언하듯 말해버렸다...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p.259)


하지만 엄마와 이모가 모두 살해되고, 나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나 다름없는 해진 또한 차 사고로 수장되면서 이제 나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 동시에 여러 건의 살인 사건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이제 나는 짐작하기 어려운 새로운 ‘종의 기원’이 될 지도 모른다. 머리는 좋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이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겁먹은 것’에게만 끌리는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꽤 긴 분량의 장편이지만 소설은 어쩌면 이 새로운 종의 탄생에 대한 프롤로그 역할에서 멈추고 있는 것 같다. 유진은 아무런 맥락 없이 불쑥, 최고 레벨의 사이코패스 프레데터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그러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소설은 미스터리한 형식으로 과거 혹은 대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고 이것이 소설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긴장감을 폭발시키기에 내용의 밀도와 설득력은 부족해 보인다.



정유정 / 종의 기원 / 은행나무 / 383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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