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바늘땀에서 시작되어 나머지 모든 바늘땀에로 이어지는...
한복거리에서 바느질하던 여자는 자신의 두 딸인 금택과 화순을 데리고 우물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의 서쪽 방에서 평생에 걸쳐 바느질을 한다. 직접 천을 뗘오고 그 천에 물을 들이고 바람에 말려 서쪽 방에서 누비옷을 만든다. 금택이 세어 본 바에 다르면 세 뼘 길이의 누빌 선에 149개의 바늘땀이 들어가야 하는 누비옷을 만든다. 그녀는 그 누비옷으로 두 딸을 키웠고, 그 지난한 바느질이 바로 그녀 자체였다.
“바늘땀 하나에 쌀 한 톨...... 어머니는 여전히 누비옷을 지어 쌀과 연탄을 들이고, 소금과 밀가루를 사지...... 어머니가 바늘땀을 하나 떠 넣을 때마다 쌀이 한 톨 생기지. 바늘땀 한 되에 쌀 한 되, 바늘땀 한 가마에 쌀 한 가마. 밥을 안치려고 무심코 쌀 항아리를 열다가 깜짝 놀라고는 해. 쌀알들이 바늘땀들 같아서. 흰 쌀알들이 어머니가 누비저고리나 누비치마에 떠 넣은 바늘땀들 같아서.” (p.441)
소설은 바느질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바늘땀이 나머지 수만의 바늘땀으로 이어지듯, 하나의 바늘땀이 곧 나머지 모든 바늘땀과 마찬가지이고 모든 바늘땀이 하나의 바늘땀과 마찬가지이듯) 그 여자와 이어진 두 딸인 금택과 화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금택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어린시절부터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과 비유하면서 보는 눈을 가졌다. 그리고 소설은 주로 금택의 시점으로 우물집의 여인들을 우물집에 드나드는 여인들을 바라본다.
“... 저녁 밥상에 올라온 국과 반찬들은 어머니가 누비옷을 짓는 데 쓰는 천들과 묘하게 닮았다. 들기름에 볶다가 쌀뜨물을 붓고 끓인 무국은 명주를, 된장에 무친 무청시래기나물은 광목을, 데쳐 조선간장에 무친 배추는 무명을 닮았다. 갓 지은 쌀밥에 미리 삶아 식혀둔 보리를 섞은 밥은 광목을... 어머니가 한 가지 천이 아니라 서너 가지 종류의 천으로 옷을 짓는다는 것을, 천들마다 감촉과 광택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안 뒤로, 금택에게는 천을 음식과 비교해 이해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래기된장국은 광목을, 콩나물국이나 무밥은 무명을,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이나 가지무침은 명주를, 계란찜이나 파죽은 양단을 닮았다. 금택은 명주를 닮은 음식을 좋아했지만, 화순은 양단을 닮은 음식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무명을 닮은 음식을...” (pp.21~22)
바느질하는 여자의 딸들이지만 금택과 화순은 너무 다른 성정을 지니고 있다. 두 살 터울의 그들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녀들이 한 배에서 나온 자매인지는 소설 내내 모호하게 그려진다. 금택은 화순만이 어머니의 친자식일 것이라고 믿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부령할매도 한복거리의 많은 바느질하는 여자들도 누비옷을 의뢰하기 위하여 우물집에 들락거리는 여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들의 출생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으면서 소식을 했다.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어머니는 혹독할 만큼 스스로에게 철저했다. 비구니처럼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했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우물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누비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조금밖에 먹지 않아서인지 어머니의 몸피는 갈수록 말랐다. 그렇게 계속 마르다 바늘이 되어버릴까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p.297)
바느질하는 어머니의 모든 삶의 태도가 마치 바늘땀 같다. 어머니는 두 딸들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녀들의 삶에 영향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느질하는 어머니는 그녀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직접 배운 바가 없지만, 어머니는 두 딸이 아주 어릴 때 그녀들에게 바늘 하나씩을 건넨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우리 전통 누비를 서양식 퀼트와 비교하지만, 그 둘은 달라. 퀼트는 다양한 색깔의 천 조각과 실을 사용하지만, 우리 전통 누비는 한 가지 색상의 천과 실을 사용하지. 둘 다 홈질을 기본으로 하지만, 바느질을 할 때 퀼트는 천을 손에 들고서 하고, 누비는 천을 바닥에 놓고서 하니까. 퀼트에서는 천 조각들의 조화가 중요하지. 누비는 똑같은 바늘땀들의 반복을 통해 아름다움에 도달하지. 자기 수양과 인내, 극기에 가까운 절제를 통해 최상의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게 우리 전통 누비야.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침선법이지.” (p.409)
소설은 숫자가 매겨지지 않은 작은 챕터들이 포함된 몇 개의 큰 챕터들로 채워져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퀼트를 떠올렸다. 조각난 천들이 뒤섞인 조각보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은 이것들보다는 역시 누비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세대가 이어지는 세 명의 여인들의 이야기는 파편화된 채로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그저 한결같음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하나의 바늘땀이 나머지 모든 바늘땀과 같은 것이듯...
김숨 / 바느질하는 여자 / 문학과지성사 / 631쪽 / 2015 (2015)
ps. ‘어머니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풀을 먹인 무명 세 장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렸다.’라는 문장 뒤에 따라 나오는 설명에서는 두 가지 방식만 등장한다. ‘미역이 난 곳이 진도냐, 기장이냐, 완도냐, 영덕이냐에 따라 다른 것처럼.’ 이라는 문장 뒤의 설명에서 영덕의 미역은 언급되지 않는다. 소설의 초반부에 이런 부분이 있는데, 이후 소설을 읽는 내내 이게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