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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흰》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서 하얗게 떠올려야만 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한강을 읽을 때면 항상 떠오르는 후배가 한 명 있다. 후배는 스스로에 반달, 이라는 필명을 부여하였고, 니체를 좋아하였으며, 어느 순간부터 한강이라는 작가를 흠모하기 시작했다. 90학번인 후배가 언제부터 한강을 좋아하기 시작했는지도, 지금도 한강을 좋아하는지도 알수 없다. 한강의 소설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 후배가 떠올랐다.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열네 살 무렵 시작된 편두통은 예고 없이 위경련과 함께 찾아와 일상을 정지시킨다. 해오던 일을 모두 멈추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다. 손끝이 스치면 피가 흐를 것 같다. 숨을 들이쉬며 한순간씩 더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일상으로 돌아온 뒤까지도 그 감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숨죽여 서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p.11)

후배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99년이었다. 후배는 서울과 면한 경기도의 어느 한 도시에서 부모님과 형과 함께 살았다. 후배의 집은 오래 된 단독주택이고, 복도는 좁게 삐걱거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후배의 방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후배는 학원에 취직하였다고 했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일할 수 있음에 고무되어 있었다. 후배가 내 방에서 자고 갔는지, 그날 밤 마지막 잔을 내려놓고 떠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 후 후배가 모든 사회생활을 접고 스스로를 집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p.31)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꿈에 후배가 나왔다. 구한말 서울의 변두리쯤이라고 생각되는 장소였고, 작은 계곡과 버드나무, 바위가 있는 오르막과 나무로 된 집이 꿈에 보였다. 그 집의 방에서 후배를 발견했는데 내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다음날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는 난독증을 앓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다고 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영어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세상과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p.96)

후배와 전화 통화를 하고 또 오 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The Vegetarian> 으로 번역이 되었다고 했을 때 또 후배를 떠올렸다. 난독증에 걸렸지만 영어를 읽을 수 있는 후배는 한강을 읽었을까. 아직 주소록에는 후배의 전화번호가 있어서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집 전화번호 뿐이어서 혹시 후배가 아닌 다른 이가 전화를 받게 될까 두렵기도 하다.

“...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p.117)


그건 그렇고, 흰... 처음 ‘흰 것’에 대해 쓰려고 결심했을 때 소설 속 내가 작성한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들어 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그리고 한강이 나, 그녀, 모든 흰이라는 세 개의 챕터에 쓰고 있는 ‘흰’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문,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도시,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은, 빛이 있는 쪽, 젖, 그녀, 초, 성에 서리, 날개, 주먹,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은하수, 하얗게 웃는다, 백목련, 당의정, 각설탕, 불빛들, 수천 개의 은빛 점, 반짝임, 흰 돌, 흰 뼈, 모래,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빛의 섬,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흩날린다, 고요에게, 경계, 갈대숲, 흰나비, 넋, 쌀과 밥, ―, 당신의 눈, 수의, 언니,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소복, 연기, 침묵, 아랫니, 작별, 모든 흰.’ 그런데 그 후배의 웃음이, 그 성정이 참 하얗기는 하였는데...


한강 / 흰 / 난다 / 129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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