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감각을 향하여 뻗은 정신의 촉수를 따라 생각 없이 생각하기...
“나는 상실에 대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상실을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가 더 좋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보다 이미 많은 걸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에 매혹된다.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이야기보다 잃어버릴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든다. 이야기 속에 커다란 구멍이 들어 있는 게 좋다. 매력적인 이야기들에는 대체로 커다란 구멍이 들어 있다... 우리는 구멍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메우고 싶어진다. 메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구멍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해본다” (p.41)
김중혁의 산문을 읽는 일은 즐겁다. (작가의 단편 소설을 읽을 때도 즐겁다. 그의 단편 소설에는 구멍이 많다. 그의 장편 소설은 재미가 덜한데, 생각해보니 구멍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걸 읽는 동안 이런저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각들이 저절로 떠올라서 더욱 좋다. 그건 작가가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상상들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상대방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 결핍을 눈여겨보지 않을 때 불필요한 질투가 생겨나고, 결핍을 비난하면서 재능을 애써 무시하려 할 때 무시무시한 편견이 시작된다. 누군가를 천재라고 부르는 순간, 그의 결핍이 뒤로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를 솔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의 무언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특별한 이름을 호명하는 것은 아닐까. 천재, 바보, 사이코, 등신, 장애인, 그런 이름들로 뭔가를 슬쩍 가리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솔직하지 않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닐까.” (p.140)
그러니까 가령,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터넷 방송에 소설가가 등장하는 장면 같은 것을 상상한다. 소설가는 컴퓨터를 켜고 지금 쓰고 있는 파일을 연 다음 카메라를 작동시킨다. 화면이 분할되어 한쪽에는 소설가의 고뇌에 가득한 표정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 파일이 떠 있다. 시청자들은 방송을 보면서, 소설가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일 때 혹은 갑작스레 다다다다다다 소설이 진척을 보일 때, 별풍선을 마구 쏴대는 것이다.
“... 시간은 우리를 어떻게 마모시키는가. 혹은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붙잡으려 하는가. 아니, 그럼에도 시간은 어떻게 달아나는가. 아니, 결국 기억은 시간의 부스러기일 뿐인가. 우리가 시간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착각일 뿐, 우리는 가만히 서 있고 시간이 우리의 곁에서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는 절대 시간보다 빨리 달릴 수 없다. 시간의 앞모습과 마주할 수 없다.” (pp.164~165)
사실 이번 산문집은 몸에 대한 것이다. 책의 제목부터 ‘바디무빙’이며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오래전부터 몸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책의 각각의 챕터 제목에는 손과 발과 종아리와 입이 포함되어 있고, 팔짱이나 재채기나 자위행위나 주먹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몸과 몸이 만들어내는 행위를 다루면서, 작가는 이를 확장하여 우리의 정신과 이런저런 감정에까지 촉수를 들이민다.
“... 영화 <와일드>에도 그런 장면이 있었다. 이혼하는 남녀가 헤어지는 날 문신 가게로 간다. 이별 기념으로 각자의 몸에다 그림을 새겨넣는다. 결혼은 고통의 기억이자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자 온몸으로 감각해야 할 한 사건이다.” (p.237)
그리고 이런 몸과 몸이 만들어내는 행위에 대한 서술이 용이하도록 정신을 풀어내는 것처럼 각각의 글에는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이 등장한다. 그렇게 등장하는 영화나 책이 원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기에 작가가 은근히 뻗은 촉수가 내가 뻗은 촉수인 것만 같아서 반갑다. 앞뒤 분간하지 않고 이것저것 더듬어대고 그렇게 더듬은 것을 마구 떠들어대는 것 같지만 그 사이사이 빨려 들어오는 재미는 감각적이기도 하다.
“... 남자들은 자신의 체계를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공감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공감 능력은 ‘차이를 이해’하는 것인데, 남자들은 그러질 못한다.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고 지적했다... 공감이 우선이고, 체계화는 두 번째다. 남자들이 설명한다면, 여자들은 서술한다...” (p.259)
곁들여서 책의 중군중간 그림과 만화도 등장한다. (작가는 그림과 디자인에도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림에서는 우리 신체의 각 부위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달고 있고, ‘몸의 일기’라는 제목의 만화에서는 그야말로 몸과 관련한 사적인 일화를 적고 있다. 십수년 수영을 배우고 즐겼던 입장에서, (아마도 수영을 배운 것 같은 작가의) 아래와 같은 문장을 너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작가의 산문집은 생각 없이, 생각하기에 딱 좋다...
“수영을 하다보면 가끔씩 생각이 없어질 때가 있다. 가장 싫은 순간은 내가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다. 아, 좀더 생각 없이 있을 수 있었는데...”
김중혁 / 바디무빙 / 문학동네 / 283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