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용탁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주경야독에서 발현되는 소소하고도 치열한 어떤 삶의 양태...

by 우주에부는바람

*2016년 5월 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어버이날이다. 그제는 여동생이 대전에서 올라와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고, 어제는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찾아가 처남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일 특히나 선물을 고르는 일을 곤혹스러워하는 탓에 언제나 용돈 봉투를 식사 끄트머리에 드리는 것으로 어버이날 행사를 마무리 짓고는 한다. 부모님들은 그렇게 일 년이 더 늙으셨고, 우리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여러모로 예술적인 감성이 있는 분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젊었을 때 혼자 배웠다는 기타로 수준급의 연주를 하기도 한다. 내가 문학의 길로 들어선 것도 거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대화가 늘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버지의 대화에서 깊은 단절감을 느낄 때는 정치나 사회문제를 입에 올릴 때이다. 뿌리 깊은 반공의식이야 시대의 한계와 의식을 깨우칠 만한 계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평소 입에 담지 않는 거친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듣기가 괴롭다. 이념도 아니고 신념도 아닌, 그저 증오에 찬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불쌍하다. 반공이라는 허위 의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둘로 나누어 일방적으로 한편을 매도하는 아버지는 정신적인 불구를 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위정자들의 선전과 조선일보류의 파시스트들이 아버지를 불구로 만든 것이다. 전에는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요즘은 잠자코 혼자 열을 내시다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린다.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대해 더 너그러워지고 타인을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다만 슬플 뿐이다.” (pp.16~17)


아버지는 오랜 세월 군생활을 하셨고 예편 뒤에도 육군본부에서 군무원으로 일 하시며 정년을 채우셨다. 아버지가 일 번이 아닌 이 번에 투표한 것은 아마도 김대중이 출마하였던 대통령 선거가 유일하셨으리라 넘겨짚고 있다. 이러한 세대 간의 차이가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가 이러한 투표 방식의 극대화를 조장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저자가 분노하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 보다는 이러한 아버지를 향해 끊임없이 편향된 생각을 주입하는 종편을 향해 더욱 분노한다.


부모자식 간의 이러한 간극을 느끼는 것이 나만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십여 년 전 귀농하여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으니, 그렇게 매일매일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장벽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고 있고 선거가 있을 때마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아버지와 나 사이의 간극을 느끼고 분노할 수밖에 없음에 슬퍼하곤 한다.


“날씨가 더워져서 자연스럽게 일찍 깨어나는 건 나무뿐이 아니다. 각종 충과 균들도 뒤질세라 그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바빠져서 꽃을 따는 손길이 급해진다. 예전에는 과수원에 꽃이 만발했다가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열매솎기를 했는데, 요즈음은 조금이라도 더 과일을 키우기 위해 채 피지도 않은 꽃송이부터 사정없이 따낸다. 될성부른 놈만 남기고 나머지는 말 그대로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신세다. 요즘처럼 사과 과수원에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면 지나가던 차들이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농민들은 주인의 게으름을 탓하며 혀를 찬다.” (pp.65~66)


물론 책은 이 주경야독 하는 저자의 농사꾼으로서의 일상생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선거가 잦아서 이 정부의 실정이 잦아서 정치적인 내용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은 내가 꿈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경제적인 생활까지 가능한 것으로 되기에는 우리의 농정이 파탄지경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야독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일정 정도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주경만으로는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몇 해 전 아버지는 시골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꿈을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는 완강하신데, 자식들을 자주 볼 수 없는 생활을 어머니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아내에게 시골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내는 한강 남쪽에서 북쪽으로의 이주도 힘들어 했으니...)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리고 아버지가 더 나이가 들게 된 어느 날,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를, 상상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때에는 나와 아버지가 좀 더 허심탄회하게 정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별무소용 할지라도...


최용탁 /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 녹색평론사 / 285쪽 / 2016 (201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중혁 《바디무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