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앤드루 포터 《사라진 것들》

일상에 생긴 미묘한 균열의 흔적을 손끝으로 따라가다...

  작가의 전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2008)이 국내에서 출간된 것이 2011년이다. 작가의 단편 소설이 던지는 뉘앙스의 묘미가 깊고 융숭하여 크게 감응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넘어 흐른 다음 출간된 《사라진 것들》도 전작에 뒤지지 않는다. 단편 소설과 엽편 소설이라고 부를만한 것들 열다섯 편이 함께 실려 있다. 일상에 생긴 미묘한 균열, 그 작은 흔적을 아스라하니 잘도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오스틴」

  “...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정당화가 되느냐 아니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두 인간과 그들 각각의 가족에게 일어난 아주 슬픈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 (pp.14~15) 친구 중 유일하게 아이가 있는 내게 친구들이 묻는다. 만약 집에 들어온 십대 소년을 정당 방위라는 형식으로 죽였다면,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한 살인을 저지른 당사자가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면, 이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네 살 그리고 다섯 살인 아이들이 자고 있고, 나보다 먼저 자리를 떠났던 아내가 있다.


  「담배」

  평생 계속 피울 거라고 생각했던 담배를 끊은 지 사 년 만에 나는 ‘응급용 담배’라며 숨겨 놓았던 담배를 꺼내고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넝쿨식물」

  나는 젊은 시절 마야라는 미술 작업을 하는 여자와 동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머무는 집의 주인은 라이어널이라는 이였는데 그는 화가였고, 마야는 그의 작업실을 일정 시간 이용할 수 있었다. 나와 라이어널, 나와 마야 그리고 마야와 라이어널의 관계들은 마치 거미줄만 같다. 이리저리 빛의 각도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져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손을 뻗으면 거기에 묻어날 것 같기도 하다.


  「라임」

  우리의 친구 로레나, 로레나가 준 라임나무, 그리고 로레나의 다섯 번째 결혼 혹은 다섯 번째 남편...


  「첼로」

  “그때 나는 스튜디오로 조금 더 가까이, 하지만 내털리는 나를 볼 수 없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맨발 아래 시원한 땅이, 등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당에 짙은 어둠이 깔려 강렬하게 빛나는 스튜디오의 조명 외에는 온통 캄캄했다. 나는 더 다가갔다. 내털리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털리가 나를 볼지, 이번 한 번만이라도 문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들여줄지.” (p.93) 나의 아내 내털리는 첼로 연주자인데 ‘뇌심부자극’이라는 용어와 연관되어 있는 손떨림 병증으로 더 이상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될 예정이다. 바로 그 단계에 나와 아내가 있다.


  「라인벡」

  “보통의 밤이면 나는 저녁 영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리를 지킨다. 그러다가 주방 직원이나 웨이트리스들과 잠시 어울리면서 그들이 주고받는 손님 뒷담화를 듣고 와인을 마시거나 뭐든 남은 음식을 먹는다. 가끔 데이비드가 나와서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리베카가 메뉴에 추가하려고 검토중인 와인을 가지고 들르기도 한다. 우리는 각자 한 모금씩 마시고 나서 리베카에게 의견을 말할 테고, 그러면 리베카는 한참 자리를 떴다가 삼십 분쯤 뒤에 다른 것들, 일테면 또다른 와인 한 병, 치즈 한 접시, 플루오트타르트 같은 음식을 들고 나타난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주방 직원들은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웨이트리스들은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하고, 나는 이 어둑한 방에 홀로 남아 흔들리는 촛불과 창밖에서 느리게 흩날리는 눈을 바라볼 것이다.” (pp.95~96) 라인벡에서 ‘폰테인을 경영하는 데이비드와 리베카’는 나의 오랜 친구이다. 이십 년이 된 친구이고 바로 이들 때문에 나는 라인벡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은 오스틴으로 떠날 생각이고 어쩌면 그것은 나때문일 수 있다.


  「고추」

  내 옆집에 살던 테레사는 방문자에게 여러 종류의 고추를 내어 놓고는 했다. 테레사가 ‘엘디아블로’라고 부르는 고추도 있었는데, 테레사는 그것을 만지지도 말라고 경고하고는 했다. 그리고 일 년 뒤에 테레사는 유방암 진달을 받았고,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숨을 쉬어」

  친구네에서 아이는 물에 빠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고를 당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침을 하였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간혹 기침을 하였는데 일단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어린 아들은 나보다는 아내를 따른다. 아이는 내게 냉랭하다. 아이는 내게 묻는다. 자기가 물에 빠진 시간에 아빠는 뭘 하고 있었냐고...


  「실루엣」

  나와 에이미는 폴과 일레인 부부의 초대에 응하곤 하지만 이 부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에이미는 내가 정년직 교수가 되지 못한 것에 폴의 배신이 있다고 여긴다. 그래도 우리는 이 부부의 초대에 응한다. 그들 앞에서 이 배신을 내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저녁 모임에 등장한 또다른 이에 의해 나와 에이미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나와 에이미는 집으로 향한다. 폴과 일레인은 우리 부부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디저트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소리친다.


  「알라모의 영웅들」

  신혼 시절에 나는 알라모에서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일을 한 적이 있고, 근무가 끝나면 들르는 아이스하우스(시원한 맥주를 파는 야외 술집)에서 아내인 케일라의 재촉에 의해, 알라모에서 죽은 병사들의 이름을 외우고는 했다.


  「벌」

  세탁실에 벌이 출현하였고 이를 발견한 것은 아니였다. 전문가를 불렀지만 벌과 관련한 문제를 처리하지는 못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어린 리아가 있지만 아내는 우리집이 아닌 또다른 자신만의 공간을 원했다. 시내에 아파트를 구했고 필요할 때 아내는 그곳에서 지낸다. 그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나는 어느날 아내가 산다고 여겨지는 아파트 근처까지 리아를 데리고 간다. 아내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잠시 줄어들었던 것 같은 세탁실의 벌은 다시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포슬레」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 집에 어린아이가 둘 있어서 아내와 나는 잠을 거의 못 자고 심지어 대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이 식당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사십오 분 동안 수프를 먹고 신문을 읽고 가끔은 와인을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식당은 어둡지만 편안했고, 배경음악은 주로 경쾌한 어쿠스틱 멕시코 음악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온 오래된 곡들이었다. 손님들은 대체로 나이가많거나 그렇게 보이는 이들, 모르긴 해도 이십 년, 삼십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들었을 사람들이었다...” (p.232) 이 식당에서 나는 포슬레 수프(돼지고기와 고추, 옥수수, 각종 야채 등을 끓여 만든 멕시코 음식)을 먹었는데, 어느 날 그 메뉴가 사라졌다.

 

  「히메나」

  “그날 밤에 칼리는 직장에서 늦게까지 일했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평일 닷새 중 사흘 저도 우리 아파트 앞 도로 건너편에 오는 타코 트럭에서 저녁을 사 건물 앞 계단에 앉아 먹었고, 히메나는 내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p.263)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중 가장 길다. 나와 칼리는 한 집에 살고 히메나는 아랫집인가에 살았다. 살았다, 라고 적는 건 지난 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때... “때로 히메나는 내 아내가 나를 버리고 찾아간 여자다. 어떤 때는 내가 아내를 버리고 찾아간 여자다. 또 어떤 때는 둘다 아니다... 이제 나는 히메나 얘기를 잘 하지 않고 내 아내 칼리도 그렇다. 나는 아내를 떠난 적이 없고 아내도 날 떠난 적이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말 역시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p.235)


  「빈집」

  나와 아내가 입주한 건물에는 빈집이 하나 있었고, 집주인 마누엘은 그 빈집에 들어가고는 했으며, 나와 아내는 그 행위이에 이야기를 덧대었다.


  「사라진 것들」

  친구인 대니얼이 사라졌다고 그의 여자친구 앙투아네트가 알려왔다. 자의에 의한 사라짐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고 범죄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가 돌아올 확률이 있는 시간은 지나가버렸다. 나는 대니얼의 집에 가서 앙투아네트가 집을 정리하는 걸 돕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라진 것은 대니얼만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진실도 함께 사라진 것일 수 있다. 



앤드루 포터 Anderew Porter / 민은영 역 / 사라진 것들 (The Disappeared) / 문학동네 / 331쪽 / 2024 (2023)

매거진의 이전글 조너선 캐럴 《나무바다 건너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