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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홀》

혼수상태로부터 기어 나와 다시 거대한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야 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편혜영의 네 번째 장편 소설이다. 문장의 그로테스크함은 사라지고, 상황의 그로테스크함은 아직 남아 있다. 오기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대학 교수이고, 아내와 함께 강릉으로의 여행을 위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중 사고를 당하였다. 소설은 주인공 오기가 사고 후 처음으로 정신을 차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얼마간 혼수 상태에 있었을 것이고, 이제 겨우 눈으로 들어오는 빛에 반응을 시작한 정도일 것이다.


“거울 속의 오기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자신임을 확신하는 건 침대 발치의 이름표뿐이었다. 오기는 신체적 불구를 확인했을 때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pp.39~40)


하지만 조금씩 정신이 수습되고 상황을 파악하게 될수록 오기는 난감해진다. 그 사고에서 아내는 사망했다. 오기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겨우 목숨만을 건졌다. 겨우겨우 왼쪽 손가락을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이고, 턱관절을 비롯한 얼굴도 망가진 상태라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는 이미 오래전 부모를 여위었고, 이제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장모뿐이다. 그런데 이 장모를 대면하는 일 또한 쉽지는 않다. 장인의 사망 후 장모는 아내에게 전적으로 의지했고, 지금 장모에게는 아내가 없다.


“... 오기는 지쳐 있었다. 누구를 위로한 처지가 아니었다. 오기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었다. 장모는 그걸 알아야 했다. 장모가 자신을 보며 우는 걸 이해해왔지만 앞으로는 화가 날 것 같았다.” (p.51)


그리고 이제 오기는 그와 아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입주 간병인과 함께 생활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간병인의 망나니 아들이 오기뿐인 집에 드나들고 결국 장모는 이들을 쫓아낸다. 이제 오기의 곁에는 장모만 남아 있다. 하지만 장모는 아내가 남긴 메모를 통해 오기와 아내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린다. 불행하였던 오기의 아내, 오기와 제이 사이의 관계 등을 알아차린 후 장모는 조금씩 변해간다.


“오기가 생각하기에 죄와 잘 어울린다는 것만큼 사십대를 제대로 정의 내리는 것은 없었다. 사십대야말로 죄를 지을 조건을 갖추는 시기였다. 그 조건이란 두 가지였다.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진 게 아예 없거나...” (p.78)


장모는 아내가 몰두하였던 정원에 커다란 구멍을 파기 시작한다. 오기는 알 수 없는 위협 속에서 스스로를 구하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물리 치료사는 그의 구원 요청을 장모에게 알리고, 수술을 앞두고 있던 오기의 담당의는 의문의 사고를 당한다. 집을 방문한 제이 또한 그의 요청을 들었지만 다시 찾아오지는 않는다. 이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두 팔만을 이용하여 방을 나서고 마당으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그가 도착한 곳은 장모가 커다랗게 파놓은 구덩이 속이다.


“이런 날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지금처럼 구덩이에서가 아니라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날... 쓰잘머리 없는 이야기를 길게 나누던 날, 그러고도 졸릴 때까지 함께 책을 읽던 밤, 읽은 책 얘기를 들려주거나 그 얘기를 듣다가 잘 손질된 침구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들던 날, 한가하고도 소박한 일이 바둑판처럼 되풀이되던 날, 어느 인생에나 있기 마련인 완벽하게 안녕하던 날, 지금과 명백히 달랐던 날들 중의 어느 하루.” (p.206)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침대에 누운 오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겨우 구멍에 도착할 뿐인 오기를 떠올린다. 그가 살아온 세월과 소설 속에서 살아내는 시간을 생각해보고, 이제는 부재한 그의 아내를 복원시켜 본다. 그런데 선명하지 않다. 오히려 도드라지는 것은 그의 장모이고, 그를 잠시 돌보았던 입주 간병인이다. 그 입주 간병인의 망나니 아들과 어딘가 스치듯 지나가는 물리 치료사가 떠오른다.


장편 소설이 아니라 단편 소설쯤에서 마무리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중간중간 불필요하게 등장하고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있다. 오기와 장모 (또는 아내), 오기와 입주 간병인 혹은 오기와 물리 치료사 이도 아니면 오기와 제이, 이들 중 어떤 대립항에 몰두하였다면 낫지 않았을까. 초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상황을 파악해가는 순간의 공포,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공포에 집중하고, 증폭시키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편혜영 / 홀 The Hole / 문학과지성사 / 209쪽 / 2016 (2016)



ps. 소설을 읽는 동안 케이블 티비에서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는데, (혼자 술을 마시면서 두 번쯤 보았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틀어 놓은 채 술을 마신 것 같다, 그렇게 자주 틀어주는 영화였는데도) 도저히 제목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반신불수가 된 대학 교수를 백치미에 가득한 여인이 섹스로 치료한다는 설정의 영화이다. 처음에 대학 교수는 여인의 강제적인 섹스에 수치심을 느끼지만 점점 회복되고 결국 완전히 낫게 되고, 그 후 그 여인을 다시 찾아나서게 된다, 는 정도의 줄거리를 가지고 있던 영화이다. 이 영화를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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