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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인 우리들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외로움이라는 딜

by 우주에부는바람

*2016년 2월 2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는 낮고 부드러운 성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깨달았다.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는 깨달음 같은 건 없다고,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는 이별이 없듯이. 누군가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농담으로 들린다면, 그건 잘못된 삶이라고. 그러므로 나의 삶은 완벽한 실패라고.” (p.58)


이월의 막바지, 바깥으로 눈이 날리고 있다. 진눈깨비보다는 크고, 함박눈보다는 작은, 그 사이의 어디쯤으로 측량될 눈이다. 필리버스터는 계속 되고 있고, 그러나 테러방지법은 통과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다. 백영옥의 이 연애 이야기 혹은 사랑 이야기를 읽는 것이 왠지 불편하였다. 그러고 보니 백영옥의 예전 소설 《스타일》을 읽은 2008년 6월에는 촛불 집회가 한창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말은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긴 해도 옳은 문장은 아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나와 별개의 문제일 수 있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자명한 사실에 사람들은 한 번 더 상처받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를 사랑하는 일, 이것보다 더한 기적을 나는 본 적이 없다...” (p.107)


작가에게는 불운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이미 작가는 그럴싸하게 자리를 잡았다. 당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의 이런저런 관심사에 집중하는 (그래서 이 작가를 한국형 칙릿 소설의 작가로 분류로 분류할 수 있으려나...) 작가의 이번 소설 또한 여성 주인공에 집중한다. 소설 속 세 개의 챕터의 주인공인 정인, 마리, 수영은 모두 여성이다. 그렇게 소설 속의 화자들도 모두 여성들 뿐이다. 물론 그 사이에 성주, 라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남성이 있기는 하다.


“... 아마추어와 프로의 유일한 차이가 뭔 줄 알아? 시간이야. 시간 때문에 가능해지는 프로의 세계란 게 있어. 몇 년, 몇 십 년을 한 주제를 관통해 작품을 만드는 열정은 희귀한 것이라,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시간의 가치는 앞으로 더 상승할 거야...” (p.149)


이렇게 작가는 프로의 세계를 걷고 있다. 자신의 관심이 가 닿고 있는 주제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로 인해 작가가 택하고 있는 여성과 그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고 있는지, 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쨌든 작가는 구태여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 되도록 남성의 시선을 배제하려고 한다.


“미국의 법은 적어도 2년 동안 결혼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10년 이상의 영주권을 준다. 그것은 그가 조금 더 이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는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지금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살아야 하는 것, 그게 그의 현재이며 미래였다.” (pp.163~164)


물론 그렇게 해서, 소설이 한 남성을 가운데 둔 세 여성 사이의 무엇인가가 아니라, 남성과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세 여성의 서로 다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는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리가 아닌 두 여성, 정인과 수영 특히나 정인의 존재는 너무 희미하다. 마리가 주도적으로 성주와 부딪치고 깨뜨리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면, 수영과 정인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주도권을 쥐어가는 지에 대해서는 띄엄띄엄 읽힐 따름이다.


“결혼을 결정하고,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이혼을 선언한 건 나였다... 사랑의 진짜 권력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날의 성주처럼.” (p.179)


소설책의 표지에 아래의 문장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나 또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보기도 하였다. ‘각자의 사랑’으로 외로운 사람들만큼이나 그렇게 ‘사랑이라는 행위’와 사랑에 빠진 이들 또한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외로움을 덜어내기 위하여 사랑을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 덜어낸 만큼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다시 보충해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딜레마다.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너무나 외로워 내 그림자라도 안고 싶어졌다.” (p.247)



백영옥 / 애인의 애인에게 / 위즈덤하우스 / 279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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