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두레박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 조금 기이한 경험을 했지 뭡니까? 어떻게,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p.116)
이런 식으로 운을 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책 안에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택시 기사였지만 내게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목소리를 내비친 이는 포장마차 차양에 닿을 듯 말 듯 차를 세워놓은 청과물 트럭의 사내였다. 차가 멈추는 동안 천둥 같은 엔진 파열음이 거듭되는 통에 몇차례 뒤를 돌아봤다. 여기저기 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내 옆으로 자리를 잡고는 소주 한 병만 달랑 시켰다.
물 컵에 소주를 반병쯤 따라서 단 번에 들이킨 사내는 잠시 자리를 비워 제 트럭에서 오이를 하나 가져왔고, 남은 반병을 다시 물 컵에 따르고 나서 오이를 절반쯤 베어 물고, 아삭아삭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내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음, 고백하자면, 이렇게 운을 떼고 나는 즉시 짧은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내려다가 실패했다. 청과물 트럭을 모는 사내가 가지고 있을법한 ‘기이한 경험’을 떠올리는 일이 어디 쉬울까... 그러니까 이기호의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내가 떠올리려다 실패한 것, 스스로는 ‘짧은 소설’이라고 이름붙인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저기 그러지 마시고요, 선생님. 여기 벤치에 앉아서 저하고 같이 고등어나 한 마리 구워 드시죠. 어차피 라이터도 저 주셔서 번개탄 붙이기도 어려울 텐데...... 뭐, 그냥 허기나 채우자고요. 별도 좋은데.” (p.71)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의 끄트머리는 위와 같다. 이야기를 거슬러 오르자면, 한 남자가 죽을 작정으로 고속도로 쉼터에 차를 세우고 화덕까지 준비해 놓은 와중에, 트럭 한 대가 쉼터로 들어온다. 그리고 트럭 운전사는 자꾸 내 자동차 차창을 두들겨댄다. 라이터를 빌려 달라 한다. 나는 라이터를 빌려 주고 돌려줄 필요 없이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그런데도 사내는 다시 차창을 두들겨댄다.
이번에는 자신이 생선 납품업자인데 마트에서 사만 팔 천원 하는 것을 삼만 원에 드릴테니 가져가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맨트다. 나는 어이가 없어 하고 손사래를 치며 사내를 돌려보낸다. 죽기 직전의 나에게 사기를 치려는 사내쯤으로 이야기가 정리되려는 찰나, 사내가 다시 내 차창을 두드린다. 그리고 위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으려 하지 말고 나와 같이 고등어나 한 마리 구워 먹으며 별 구경이나 하자, 뭐 이런... 그리고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이다.
『"어머니, 아버지. 어버이날 축하드려요. 올해도 건강하시고요.“
“그래, 뭐, 너도 생일 축하한다.”
“뭐한다고 힘들게 미역국을 끓이셨어요?”
“어버이날이 뭐 별 거라고...... 할 건 해야지.”』 (p.173)
어린 식의 짧은 이야기들이 그득하다. 위의 발췌 부분은 5월 8일을 생일로 삼고 있는 내 형에 대한 이야기에 등장한다. 어버이날에 태어났으니 부모님과 함께 좋은 날을 운명적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오롯이 받을 수만도 그렇다고 오롯이 줄 수만도 없는 형의 어딘지 억울한 처지가 재미있다.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는 한데, 어린 시절 이미 그 이치를 터득해야 했던 형이라니...
책의 앞 부분에 있는 이야기보다는 뒷 부분에 있는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다. 내게는 그랬다. 원체 이기호의 단편 소설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꽉 조여진 느낌 보다는 헐렁한 느낌 속에서, 그럼에도 결국 아귀가 맞아 떨어지도록 만드는 작가의 허허실실 작법을 좋아한다고나 할까. 그러한 작법의 뒤편, 이야기의 우물 안으로 이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두레막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구나, 중얼거리며 이 책을 읽었다.
이기호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 마음산책 / 252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