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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도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오래전 다락방에서 발사된, 지금 우리들을 향한 메시지...

by 우주에부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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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그녀에게 있어 색은 사람들이 예상 못하는 어떤 것이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꿈소게서, 모든 것엔 색이 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새하얀, 소리 없는 광휘로 어머니를 상상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팔색, 빨간 딸기색, 짙은 황갈색, 야성의 초록색 등등, 1000가지 짙은 색을 뿜어낸다...” (p.75, 1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프랑스 소녀 마리로르 그리고 독일 소년 베르너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소녀는 어린 시절 시력을 잃었다. 그런 소녀를 위하여 아버지는 도시 전체를 모형으로 만들어 소녀로 하여금 길을 익히도록 만든다. 그렇게 모형으로 길을 익힌 연후에야 소녀와 함께 실제로 거리에 나선다. 파리에서 생말리의 작은 할아버지네 집으로 피난을 한 이후에도 모형은 만들어지고, 소녀는 그 모형을 통해 도시를 익힌 연후에야 거리로 나설 수 있다.


“... 눈에 보이는 빛을 뭐라고 부를까요? 색깔이라고 부른답니다. 전자기 스펙트럼은 한쪽 방향으론 0까지, 반대쪽 방향으론 무한으로 질주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실제로는 말이죠, 수학 상으로는 어떤 빛도 눈에 보이지 않는답니다.” (p.88, 1권)


프랑스에 눈이 먼 소녀가 있다면 독일에는 부모를 잃고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내는 소년 베르너가 있다. 과학 영재쯤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은 라디오를 고쳐 저 멀리 프랑스에서 날아오는 소리를 잡아챈다. 그리고 동생과 함께 그 라디오를 들으며 많은 것을 꿈꾼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고, 소년의 천재성은 엉뚱한 곳에서 사용된다. 소년은 어느 순간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다.


“‘불꽃의 바다.’ 가운데 빨간색이 깃든 회청색. 기록에 따르면 133캐럿이다. 분실됐거나, 이백 년 동안 안전한 곳에 넣어 둔다는 조건으로 1738년에 프랑스 왕이 물려받았다.” (p.218, 1권)


멀리 떨어진 채 각자 전쟁 속으로 휩쓸려 가는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와 함께 ‘불꽃의 바다’라는 보석과 관련한 미스터리가 한켠에서 꾸준히 소설을 따라다닌다.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 이번에도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만 같다. 꺾이지 않는 인간의 욕망이 전쟁을 낳고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그 욕망만은 남아서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현실이 보석의 전설을 닮아 있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p.371, 2권)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p.371, 2권)


그러니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불꽃의 바다’가 이번만큼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질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소녀와 소년이 극적으로 만나고, 그렇게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채로 보석이 그 자리를 이동하게 된 후, 결국 보석의 전설, 그러니까 보석을 가진 자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전설이 드디어 끝을 맺게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번만큼은,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을 겪고도 곧바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망이 전쟁으로 치환되는 악순환이 끝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그녀는 생각한다. 매시간, 전쟁을 과거의 기억으로 간직할 뿐인 누군가가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우리는 풀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꽃 속에서. 노래 속에서.” (p.459, 2권)


그렇게 소설은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에 빠져) 우리가 볼 수 없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곳에 존재하였던 (모든 것을 보는 것만 같은 소녀와 먼 곳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제게 도착한 소리를 따른 소년으로 대변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잊혀져가는 전쟁의 기억들에 대한 반추와 우려이며, 동시에 전쟁 후에 일어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쟁 이전과 전쟁, 전쟁 이후로 점철된 우리들 인류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에티엔과 그의 형이 다락방에서 누군가를 향하여 발사한 라디오 전파와도 같은...



앤서니 도어 Anthony Doerr / 최세희 역 /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All the Light We Cannot See) / 민음사 / 전2권 (1권 321쪽, 2권 462쪽) / 20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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