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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

‘미국의 송어낚시’가 ‘미국의 송어낚시’에 대하여 ‘미국의 송어낚시’로

by 우주에부는바람

《미국의 송어낚시》와 같은 책을 읽는 행위는 그저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이런 유형의 책은, 그러니까 일종의 현대적 고전이 되어 있는 책은 컨텍스트로 읽어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는 것은 《미국의 송어낚시》를 받아들인 사람들과 해석한 사람들을 읽는 것이고 동시대(그러니까 미국의 1960년대)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p.57)


그렇지만 의식적으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책을 읽는 행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나는 위의 문장이 아주 좋아서, 그래 이 문장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어, 라고 혼잣말했다. 이런 위안들이 없다면 소설은 MSG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시골밥상의 맛과 비슷하기도 하다. 그것도 도심 한 복판에서 비싼 값에 팔리고 있는 최소 양념으로 차려진 자연식 한 상에 가깝다. 그러니까 몸에 좋다고 해서 먹기는 먹는데, 너무 비싼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실제로 입에 맞지 않아 먹기 힘들기도 하고 그런...


그렇게 ‘미국의 송어낚시’는 조금은 무미건조하게 읽힌다. 베트남에서의 전쟁,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산업화, 이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자연 혹은 인간성으로 피폐해져가는 미국에 대한 우려를 가까스로 읽어낸다. 오히려 새로운 것은 그러한 우려에 접근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사람이기도 하고, 장소이기도 하고,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획정되지 않는 무정형의 무엇으로서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포스트모던하게 꾸려나가는 방식이다.


“이걸로 써. 하지만 이건 세게 눌러쓰면 안 돼. 황금펜촉이거든. 황금펜촉은 예민해서 말이야. 얼마 지나면 이건 쓰는 사람의 성격을 닮게 돼. 다른 사람은 쓸 수가 없게 되는 거지. 이 펜은 쓰는 사람의 그림자와도 같아. 이 펜만 있으면 돼. 하지만 조심해야 해.” (p.230)


심지어 ‘미국의 송어낚시’는 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국의 송어낚시’가 ‘미국의 송어낚시’에 대하여 ‘미국의 송어낚시’로 쓴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는 좀 먼 이야기일 수 있지만, 당시 《미국의 송어낚시》를 하나의 액세서리처럼 구매하고 소비하였던 미국의 독자들은 곧 ‘미국의 송어낚시’일 수도 있으니, 그들은 ‘미국의 송어낚시’가 ‘미국의 송어낚시’에 대하여 ‘미국의 송어낚시’로 쓴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고 있는 ‘미국의 송어낚시’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언어는 동물의 의사소통 수단과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언어의 기원을 추측해왔지만, 우리는 언어의 진화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예컨대 인간의 언어는 동물의 소리를 모방했다는 ‘멍멍 이론’도 있고, 자연의 소리를 흉내 냈다는 ‘딩동 이론’도 있다. 혹은 거친 고함이나 감탄의 소리를 흉내 냈다는 ‘푸푸 이론’도 있다. 화석에서 발견되는 인류의 조상이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언어는 화석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자로 쓰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pp.231~232, 『자연 속의 인간』, 마스턴 베이츠, 재인용)


《미국의 송어낚시》는 문자로 작성된 탓에 화석이 된 현대의 고전이다. 그 화석을 통하여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는 지금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기계 문명과 물질 문명에 저항하는 생태주의 소설로 읽을 것인지, 정형화되어가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서의 포스트모던 문학으로 읽을 것인지, 파편화된 사회를 곧바로 가리키는 초현실주의 우화로 읽을 것인지는 우리의 지금이 당도해 있는 위치에 달려 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 / 김성곤 역 / 미국의 송어낚시 (Trous Fishing in America) / 280쪽 / 비채 / 2006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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