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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 《워터멜론 슈가에서》

변화무쌍하게 내 마음대로, 선한 문체의 작가 의식을 따라...

by 우주에부는바람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불러달라.” (p.17)


워터멜론 슈가, 아이디아뜨 근처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정해진 이름이 없다. 정해진 이름이 없으니 모든 것이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이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은 독자인 내 마음에 달려 있다. 내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내 이름을 만들어 붙이기가 더욱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이미지는 나의 마음 안에서 둥글려지고 둥글려져서 제 스스로 형상을 갖게 된다.


“나는 ‘아이디아드(iDEATH)’ 근처의 한 통나무 오두막에서 산다. 나는 창밖으로 아이디아뜨를 볼 수 있다. 아이디아뜨는 아름답다. 나는 또 눈을 감고도 아이디아뜨를 볼 수 있고 만져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아이디아뜨는 차갑고, 어린아이의 손에 든 뭔가처럼 돌고 있다. 저게 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p.11)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에는 어떤 식으로든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바가 명확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렇다. 내가 사는 곳은 워터멜론 슈가라는 지역, 그 중에서도 iDEATH 아이디아뜨이다. 나와 죽음, 이상과 죽음 혹은 나의 죽음, 이상의 죽음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분히 열린 텍스트인 소설에서 이름을 어떻게 읽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이 나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과 결국 같은 식이다.


“넌 동상을 만드는 것도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책이나 쓰지그래? 35년 전에 씌어졌던 게 마지막 책이었지. 지금쯤엔 누군가 다른 책을 썼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이런, 그게 35년 전에 씌어진 책이라는 건 기억나는데 무슨 책이었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군. 제재소에 그 책이 한 권 있었더랬는데.” (p.26)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내가 아이디아뜨에서 쓰는 책이다. 375명쯤이 살고 있는 워터멜론 슈가에서 마지막 책이 씌어진 것은 35년 전이다. 나는 찰리의 제안으로 책을 쓰기 시작하였고, 이 책에는 내가 지금 사랑하는 여인 폴린을 비롯한 아이디아뜨 사람들과 잊혀진 작품들 지역에 사는 인보일과 악당들, 그리고 내가 과거에 사랑하였으며 아이디아뜨와 잊혀진 작품 지역을 오가는 마가렛 등이 등장한다.


“... 우리는 워터멜론에서 즙을 짜내 슈가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그걸 불에 졸이고, 그 다음엔 그 슈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모양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을.” (p.64)


아이디아뜨 지역과 잊혀진 작품들 지역, 현재의 사랑인 폴린과 과거의 사랑인 마가렛, 찰리와 인보일, 송어와 호랑이를 비롯하여 소설 속의 많은 것들은 이쪽과 저쪽 혹은 지금과 그때로 나뉜다. 하지만 이것들은 나뉘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이어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잘 모르게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삶의 일부분일 수 있다.


“... 그녀는 내 팔에 안긴 채 곧 잠이 들었다. 그녀의 잠은 내 팔, 그리고 그 다음엔 내 몸과 하나가 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러도록 놔두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몹시 뒤척거렸기 때문이다.” (p.63)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목가적인 환상을 꼬옥 품에 안고 있는 경전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읽는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랑의 이야기로 읽기도 한다.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을 하는 이야기이면서 사랑을 경계하는 이야기로도 읽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이 책이 내가 읽을 때마다 그 속에서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리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좋은 거다’ 라고 생각한다.


“아이디아뜨에 다다르기 바로 전에 아이디아뜨는 바뀌었다. 아이디아뜨는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변하고 있다. 그게 바로 좋은 거다...” (p.36)



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 / 최승자 역 / 워터멜론 슈가에서 (In Watermelon Sugar) / 비체 / 252쪽 / 2007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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