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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설터 《스포츠와 여가》

일인칭과 삼인칭이, 관찰자와 행위자가 두려움 없이 서로를 발가벗겨...

by 우주에부는바람

이상하기도 하지, 책을 읽는 중간 까페 여름의 선배에게 이 책과 나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를 읽는 동안, 그만 소설이 좋아져버렸다. 이것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전에, 허수경의 산문집을 읽다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산문집에 실린 문장의 허약함에 대해 말하고 돌아와 산문집의 후반부를 읽었는데, 그 허약함으로도 시들지 않는 어떤 빛에 마음을 놓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번복을 그다지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다. 어쩌면 내게 독서는 ‘스포츠와 여가’ 같은 것일 수 있으니...


“... 내가 본 것들, 발견한 것들, 꿈꾼 것들이 있는데 이제 그것들을 더는 구별할 수가 없다. 다만 내 꿈은 은밀히 얻은 그 모든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아니,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꿈이란 가장 순수한 상태의 직관이므로. 꿈이 없다면 사실들은 실에 꿰지 않은 구슬처럼 한낱 파편에 지나지 않는다. 꿈은 빗속에서 검게 빛나는 프랑스식 철제 울타리만큼이나 진실하고 명료하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진실한 것이다. 꿈이란 모든 실재의 골격이므로.” (p.76)


사실 애초에 《스포츠와 여가》는 빠져들기에 좋은 소설은 아니다. ‘심장을 건드리는 것 같은 쓸쓸한 포르노그래피’ 라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아마도 화자인 나와 주인공인 그와 그녀 사이의 틈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틈은 채워질 수 없는 작은 간극이었다가, 가교가 놓인 깊은 협곡이었다가, 신실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 다리가 놓인 꿈 속 텅 빈 공간이었다가 한다. 화자와 주인공 사이의 거리가 수시로 바뀌니 책을 읽는 내내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 어쩌면 이 소설은 매직아이처럼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야만 그 실체를 드러내는 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툉, 교회 묘지처럼 고요하다. 이끼로 검어진 타일 지붕들, 거대한 중앙 광장 샹드마르스. 그리고 이제 가을의 푸른빛 속에서 이 오래된 마을이, 뼈에 스미는 듯한 시골의 가을이 다시 나타난다. 여름은 끝났다. 정원은 시든다. 아침에는 냉기가 감돈다. 나는 서른, 서른하고도 넷―그 세월이 낙엽처럼 말라간다.” (p.19)


그 중에서도 가장 흐릿한 캐릭터는 주인공인 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으로 프랑스 오툉이라는 지방의 친구 집에서 기숙하고 있는 나는 무엇을 위해 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독자인 내가 무엇을 바라볼 심미안이 없는 것인가 두려움을 갖게도 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도 주인공인 나는 그렇게 모호하게 존재할 뿐이다. 오히려 나는 오툉이라는 공간에 더 가깝다. ‘교회 묘지처럼 고요’하고 그 고요가 ‘늙은 여자의 잠’과 같은 오툉, 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작가는 ‘오툉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볼 줄 안다.’라고 밝힌다. (소설은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일인칭 시점처럼, 일인칭 시점을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사용하고 있다)


“... 우리는 모두 그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는 그의 우정에, 그의 사랑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그의 세계의 원리다. 우리는 그것에 호응해 우리 안에서 그의 세계를 추구한다. 이것이 그의 힘이다. 나는 심지어 그 힘을 알아볼 수도 없다. 명멸하는 그 힘은 때때로 존재하고 때로는 부재한다―그 힘이 없다면 그는 공허하다. 거울에 비친 나 자신만큼이나 평범한, 생기 없는 몸뚱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그의 실존을 보장하는 것, 그가 가버리고 난 후에도 그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그 힘이다.” (p.244)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그를 만난다. 스물 다섯 살의 미국인 청년인 딘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고 나는 그를 통해 바라본다. 스물 다섯 남자의 몸은 언제든 발기하고 그 발기가 성행위로 이어진다. 나는 마치 그 성행위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 성행위의 시작과 끄트머리를 모두 관장하기로도 한 것처럼, 그 성행위에 깃든 육체적 심리적 현재 그리고 그 배경까지를 집요하게 적어낸다. 그리고 그의 상대 그녀가 있다.


“사물은 각각의 형태와 무게, 색깔이 있고, 그 위에는 스케일도 중요성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차원이 있다. 그녀의 방, 내가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그녀의 삶에는 몇 가지 물건이 있고, 그것들이 점차 초현실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어디를 바라보든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실제로 내 주위를 둘러싼 물건들에서 정체성을 훔쳐낸다...” (p.122)


열여덟 살의 프랑스 처녀 안마리는 딘에게 사로잡힌다. 딘 또한 안마리에게 사로잡혀 있다. 딘은 안마리를 위하여 돈을 빌리고 여행을 한다. 그리고 내내 두 사람은 허락하는 내내 침대로 들어간다. 안마리는 딘을 유혹하고 딘은 그 유혹을 달게 받아들인다. 계급적인 괴리감, 언어 소통의 불편함 등은 침대 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체적인 관계는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의 의례 속에서 그들은 행복하게 최선을 다한다. 둘 중 하나가 얼마나 많이 가져가는가 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한계가 없는 육체다. 그것은 그저 잊힐 뿐 결코 고갈될 수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만.” (p.89)


그 고갈될 것 같지 않은 육체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진되는 것만 같다. 프랑스 소녀는 항상 시작하는 것 같지만, 미국인 청년은 이미 중간을 넘어선 것만 같다. 이 엇박자의 템포는 침대 위에서 다시 그 리듬감을 찾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악보의 다른 페이지를 보는 일이 잦아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프랑스를 떠난다. 나는 그를 위해 돈을 빌려주기까지 하였다.


“... 저 멀리서 선수들이 부드러운 잔디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다. 외침도 고함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공을 차는 둔탁한 소리뿐... 그 텅 빈 상태, 삶의 그런 창백한 면이 내 마음에 든다...” (p.40)


소설에는 스물 다섯, 열 여덟 남녀의 육체적 행위가 지치지도 않고 실린다. 사정과 발기가, 유혹과 순진이 자유로운 두 사람은 매혹적이다. 소설 속의 나는 심판관 같지만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그저 자유로운 관찰자에 가깝다. 프랑스식 여가의 한가운데 있는 나는, 매혹적이지만 또한 창백하기 그지없는 그와 그녀의, 스포츠를 닮은 성행위에 깃든 삶의 어떤 면을 기억하려는 이다. 그리고 소설의 맨 앞장, 프랑스식 저택의 출입구 상단인 것 같은 그곳에, 아래의 문장이 적혀 있다.


‘현세의 삶이란 한낱 스포츠와 여가일 뿐임을 기억하라.’ - 『쿠란』 57장 「무쇠의 장」



제임스 설터 James Salter / 김남주 역 / 스포츠와 여가 (A Sport and A Pastime) / 마음산책 / 267쪽 / 2015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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