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자연친화적인 것이 인간친화적인 것이리라는 안도...
*2015년 10월 3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PC 통신을 하던 무렵 어울리곤 하던 몇몇 딜레탕트들이 꼭 읽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던 책들이 몇 권 있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가 그중 하나였다. (함께 떠오르는 책들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오에 겐자부로의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콜린 윌슨의 《잔혹》 뭐 이런 책들도 있다) 책은 구하기 힘들었고 (당시에는 절판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구했는지 구하지 못하였는지,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지금 헷갈리고 있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두 권을 더 주문하였다)
“난 정말 그 강이 필요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송어낚시와 그것이 보여주는 환경의 망원경을 철저히 다루고 있는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소설을 썼다. 그래서 그 작가와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것 같아 그냥 계속하려고 한다.” (p.214)
책은 《미국의 송어낚시》의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1962년에서 1970년 사이에 쓴 아주 짧은 소설들 62편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위에서처럼 소설 안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기도 하며 치기를 보이는 비트 세대의 생태문학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책에는 자신이 《미국의 송어낚시》를 쓸 때 잃어버렸던 원고를 다시 복원하여 쓴 글도 두 편이던가 포함되어 있다.)
『그 방은 천장이 높은 빅토리아풍이었고 대리석으로 만든 벽난로가 있었으며 창문에는 아보카도 나무가 있었고, 그녀는 내 옆에서 멋진 금발의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잠이 들었다. 9월의 새벽이었다.
1964년.
그러다 갑자기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녀가 일어나서 즉시 나를 깨우더니 일어나 나갔다. 그녀는 아주 진지했다.
“왜 그래?” 내가 물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일어나려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몽유병자처럼 파랬다.
“침대로 돌아와.” 내가 말했다.
“왜?” 그녀가 말했다. 금발의 한쪽 발을 마루에 발을 디디고 반쯤은 침대에 있는 채로.
“왜냐면 당신은 아직도 자고 있으니까.”
“오오오, 좋아.” 그녀가 말했다. 내 말이 맞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서 이불을 끌어다 덮고 내 옆에 바싹 다가와 누웠다. 그러고는 한 마디 말도 없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황을 마치고 깊은 잠에 빠졌고, 나는 이제 막 방황이 시작되었다.
나는 수년 동안 이 단순한 사건에 대해 생각해오고 있다. 그건 마치 희미하고 흐릿한 영화처럼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pp.125~126)
책에는 이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상당수 들어 있지만 왠지 내가 친근감을 느끼는 건 위와 같은 다른 소재의 글들이다. 위의 발췌 부분은 온전히 <희미하고 흐릿한 영화> 라는 제목을 가진 한 편의 소설인데, 읽다가 그만 기시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그야말로 잠이 덜 깬 것처럼 몽롱한 채로 소설들을 스르륵 읽어 내려갔다. 별다른 맥락 없이 펼쳐지는 풍경과 상황과 사람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간 것만 같다.
“나는 그녀를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모든 것이 어색했다. 그녀는 급히 옷을 입었기 때문에 아직 옷이 몸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엉덩이 쪽이 그랬다. 우리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p.45)
유별난 묘사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메시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읽다 보면 속애 개운해진다. 작가의 문장을 투명하다고 표현한 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작가가 다루는 투명한 자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의 문장이 갖는 담백한 맛 때문에 투명하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 그 여자는 열아홉 살 먹은 개를 엄청나게 사랑했는데, 그 개는 노망이 들어 천천히 죽어감으로써 사랑에 보답했지... 내 친구가 일하러 갈 때마다 개는 조금씩 더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었어. 열아홉이면 개로서는 죽을 나이가 훨씬 지난 셈인데, 그 개는 너무 오래 죽어가다 보니 그만 죽는 방법을 잊어버린 거지... 이 나라의 수많은 노인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들은 너무 늙었고 너무 오랫동안 죽음과 더불어 살다보니, 막상 죽어야 할 때가 되면 죽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p.74)
세상이 소란스럽고 속이 번거로운 즈음에 읽었더니 그 느끼함이 조금 가셨다. 나이 든 세대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불편함(을 뛰어넘는 분노)으로 여전히 피곤하지만, 이 땅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인식의 죽음 속에서 살다보면, 생체 나이와는 무관하게 너무 늙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너무 늙었고, 너무 오랫동안 죽음과 더불어 살다보니, 죽는 방법 혹은 물러서는 방법을 잊은 이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위정자들이 제 이익을 위하여 이들을 부추기고 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 Richard Brautigan / 김성곤 역 /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Revenge of The Lawn: Sotries 1962 ~1970)) / 비체 / 239쪽 / 2015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