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뿐인 삶에서의 실수를 확실하게 줄여줄 방법으로 책을...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p.29~31)
오래전부터 책을, 장르로 구분해보자면 주로 소설을 많이 읽는 편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읽은 소설을 조금 긴 독서카드처럼 정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내게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소설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말이지요.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했습니다. (물론 과거의 언술이기는 합니다만) 물 좋은 나이트클럽이 어딘지를 알기 위해서 모든 나이트클럽을 찾아갈 필요가 뭐 있냐, 나이트클럽에 대하여 듣는 이야기가 많으면 어디가 가장 물이 좋은지 알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취사선택 후 나이트클럽을 찾아가면 괜스레 물이 좋네 안 좋네 투덜거리게 되는 실수를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 한때 저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 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것들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9)
그러니까 소설을 읽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실컷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하나의 삶을 어떻게든 잘 살아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삶의 행로를 많이 아는 것은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삶의 행로를 살펴보는 데 소설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고르고 골라 찾아간 나이트클럽의 물이 아주 좋으란 법은 없습니다. 어쨌든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서 말이지요. 그래도 실수를 줄이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p.104)
게다가 소설은 예습과 실습 그리고 사후 검증이라는 모든 절차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나의 하나 뿐인 삶으로 이것들을 수행하기에는 그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자신이 찾아간 나이트클럽이 생각보다 못하였다면 다음에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또 다른 소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물 좋은 나이트클럽에 입성하게 되는 날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지 않아도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소설은 우리가 읽든 말든 저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p.141)
《읽다》는 김영하의 산문집 삼부작 중 마지막 권입니다. 《보다》, 《말하다》에 이은 세 번째입니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작가가 원고를 준비하여 올 봄부터 여름까지 독자들 앞에서 강연을 한 것을 다시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래서 책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읽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험한 책 읽기‘, ’우리를 미치게 하는 책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다‘, ’매력적인 괴물들의 세계‘, ’독자, 책의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그 여섯 날의 강연의 소주제들입니다.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괴물이다. 반성하라! 고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고, 괴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라스콜니코프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옹』의 소년들도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임에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 (p.177)
다시 나의 책 읽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거창한 이유들 때문에 책을 읽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염두에 두는 순간 책 읽기가 재미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읽는 일을 습관처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 뿐입니다. 습관이 되어 버리니 책 읽는 일을 빼먹으면 오히려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게다가 물 좋나이트클럽에 입성하게 되리라는 꿈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뭐, 이제 그 물 좋은, 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뭔지조차 희미해져버렸는데도 말이지요.
“사실 독자로 산다는 것에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그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통찰처럼, 비록 우리 현대인의 시야가 마치 요제프 K의 그것처럼 좁아져 있고 모두가 세속적 이해와 단기적 전망으로 아웅다웅하며 살아가고, 세계가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이 좁은 전망을 극적으로 확장해줄 마법의 문이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의 바다’로 뛰어들어 ‘책의 우주’와 접속하는 것입니다.” (pp.209~210)
김영하 / 읽다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 문학동네 / 219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