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의 논리, 그마저도 무력화사키는 쉽고도 섬세하며 올바르고 진실된...
*2015년 12월 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중앙일보에 실리는 칼럼을 읽을 일이 내게는 없다. 조중동문을 오프라인에서 사 볼 일도 없거니와 (설정을 통해 로그인 후에는 뜨지도 않게 해놨으므로) 저 신문사들의 사이트에 접근할 일도 없다. 협소하고 주관적으로 사회 관계망을 엮어 놓았으므로 SNS에서 이렇게 저렇게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사들에 조종동문의 글이 끼어 있는 경우도 거의 없다. (물론 조선일보의 간장 두 종지에 대한 글처럼 널리 조리돌림이 되는 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데 아주 간혹 중앙일보 ‘시시각각’ 코너에 실리는 권석천의 글들이 눈에 뜨이고는 하였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권석천의 칼럼을 모은 책 《정의를 부탁해》를 소개하는 글들이 페이스북 창에 드문드문 보였다. 그러니까 중앙일보 ‘시시각각’이라는 꼭지에 권석천이 쓴 칼럼들을 모아 만든 《정의를 부탁해》라는 책이 나왔는데 아주 좋다는 귀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책을 구매하였는데, ‘그는 내가 팬인 거의 유일한 글쟁이’라는 손석희의 추천의 말이 뒷표지에 실려 있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책을 읽으며, 책에 실린 그의 칼럼에 독자인 나도 빠져들었다. 이런 글들이 중앙일보에 실리고 있었다니 살짝 갸우뚱거리게 되었다. <미디어 오늘>에서는 권석천의 책을 소개하면서 중앙일보의 ‘송곳’, 권석천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아주 적당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 기사의 내용에 따르자면 권석천의 칼럼은 타사 기자들이 페이스북에 링크를 걸기 바쁜 글이었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자들이 돌려가며 읽는 ‘거의 유일한’ 칼럼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나면 이러한 저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뒤틀린 가치관과 사회의식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투영시킨 글들, 논리적인 일관성을 잃고 헤매기 일쑤인 글들, 개념어들에 매몰되어 도통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 잡을 수가 없는 글들이 차고 넘치는 지면과 모니터에서 그의 칼럼은 가히 독보적이다. 도통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제 목소리를 숨기지 않고, 절대 어려운 단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정곡을 찌르고, 짧은 글 안에서도 거의 완벽하게 수미일관하는 글들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아래에 그의 글들 중 일부를 발췌하였으나, 그의 글들 전체를 읽어보기를 권해야겠다. 우리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빌릴 필요가 있다. 비록 그가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행동하는 언론인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쩌면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감읍할 지경이다. 아니다. 어쩌면 중앙일보의 ‘송곳’이 되어 이렇게 간혹 뚫고 나오는 그의 글들이야말로 올바르고 진실한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대통령 직선제만 하면 민주주의가 이뤄질 거라 믿었다. 일상까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재편되지 않는 한 민주 정치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정보기관 직원, 군 사이버사령부 요원의 업무 내용이 상식적이지 않다면 정상적인 사회라 부를 수 없다는 사실도 예감하지 못했다... 준비된 대통령은 준비된 시민이 있을 때만 유효하다. 안타깝게도 우린 준비되지 않았고 깨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깨어 있었다면 우리의 친척이나 대학 동창인 그들이 선거 개입으로 의심받을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 6월 우린 서둘러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 자리로의 복귀를 조금 미루고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였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묻고 답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상식과 일상을 만들어가야 했다... 입으론 노동자·농민을 말하면서도 다들 자기 앞의 생生에 초조해했다... 어쩌면 그 철저하지 못함에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현실은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통속적이고 비루하다. 그래도 개선하려는 의지까지 접지는 말아야 한다. 젊은 공무원들이 허접한 글들을 리트윗하면서 안보 업무라고 믿는 현실만큼 소름 끼치는 일은 없다...” (pp.51~53, 조금만 더 잘할 걸, 2013)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판사·검사·경찰은 87년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다. 그들의 손발은 영화 <변호인>의 시대처럼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p.75, ‘공권력’을 민영화하라, 2013)
“국가의 명예란 국가가 스스로 그 명예를 주장하며 국가와 정부를 비판하는 국민을 처벌하거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고 하여 지켜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비록 악의적이고 상당성을 잃은 비판이라 할지라도 국민에 대한 설명과 설득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다.”(김태선 중앙대 교수, 2011년 논문) (p.150, "가만히 있으라“는 청와대 소송, 2014)
“‘주류主流 의식’과 ‘비주류非主流 의식’ 사이의 차이는 그만큼 크고 무섭다. 보수-영남정권 6년(1961~1997)은 일제 36년과 맞먹는 시간이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세월이다. 일제의 식민주의가 조선 지식인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것처럼 길고 긴 야당 생활을 하면서 또 다른 식민주의, 비주류 의식이 내면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비주류 의식은 나쁜 게 아니다. 소외받는 약자,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외치는 것이다. 아랫목에 안주하는 주류와 달리 찬바람 부는 광야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주류 의식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책임지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뭉치기보다 작은 차이를 이유로 나뉘고, 전략을 놓고 싸우기보다 전술을 두고 다투게 된다... 왜곡된 비주류 의식은 집권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결과 야당의 트라우마는 더 굵고 깊은 나이테를 갖게 됐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전개되고 있는 내부 갈등은 또다시 야당의 트라우마, 야당의 패배를 변명할 알리바이가 돼줄 것이다. 새정치연합에 있어 트라우마는 (박근혜 대통령과는 달리) 바닥이 보이지 않는 늪이다... 한국의 야당은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다. 단언컨대, 지금 그들은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오직 폼 나게 패배하길 원할 뿐이다. 그러니, 지는 수밖에 없다.” (pp.188~189, 새정치연합은 폼 나는 패배를 원한다, 2015)
『... 2004년 헌재 의뢰로 한국공법학회가 작성한 연구보고서를 찾아봤습니다. 보고서는 정당 해산의 오·남용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이들이 선거에서 패하게 하는 것이다. 멀고 험하고 귀찮은 길을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면역력을 강하게 만든다.”』 (p.275, 9인의 헌법재판관 여러분께, 2014)
“... 언론의 공신력이 낮아진 데는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진영논리의 스피커 노릇을 해온 영향도 작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기자들은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의식을 잃은 채 특정 진영의 종군기자, 개별 언론사 샐러리맨이 돼왔다.” (p.348, 신문은 끝났다?, 2013)
『... 우연한 기회에 수도권 대학에 갔다가 학생들이 유난히 순하고 착하다는 걸 깨달았다. ‘인in 서울’ 대학이 아니면 더 악착같아야 취업 전선에서 살아남을 텐데...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 그러니까 SKY에 못 갔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나밖에 모르는 아이, 한 문제라도 틀리면 잠 못 자는 아이, 독한 아이가 공부도 잘하는 거야.” ... 그렇게 자기 중심적인 아이들이 성장해 나라를 이끈다면 어떻게 될까. 공감과 소통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법조계 한켠에서 자조처럼 떠도는 단어가 있다. ‘반장 콤플렉스’. 공부 잘한다는 이유로 뽑힌 반장들은 대개 같은 반 친구보다 교사들에게 인정받으려 한다. 그 반장들이 지금은 판사요, 검사다... 많은 이가 ‘반장’이 되기 위해 담임교사인 검사장, 검찰총장, 법원장, 대법원장, 대통령을 바라본다. 어디 법조계뿐이랴. 정치권도, 재계도 다르지 않다. 옆과 아래는 외면하고 위만 쳐다보는 사람이 한발 더 출세할 수 있다.“ (p.388, 기성세대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2013)
“... 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가. 왜 부정의는 응징을 받지 않는가. 타는 듯한 갈증들이 역설적으로 정의의 당위를 증명하는 시대다. 정의라는 것이 불의와의 끝없는 싸움 속에서 그 내용이 확인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너무 오래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p.415, 에필로그)
권석천 / 정의를 부탁해 / 동아시아 / 415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