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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그렇게 우리는 무수한 물음들을 어쩌지 못하면서 끌어안은 채 죽어가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의 제목인 ‘죽어가는 짐승’은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 가는 배에 올라>에서 따온 것이다. ‘어느 벽의 황금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처럼 / 오, 신의 거룩한 불 속에 서 있는 현자들이여, / 소용돌이치듯 맴을 돌며 거룩한 불에서 나와 / 내 영혼의 노래 선생이 되어다오. / 내 심장을 살라다오, 욕망에 병들고 / 죽어가는 짐승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 /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그렇게 나를 / 영원의 작품 속으로 거두어다오.’ 이 시의 3연에 등장한다.


“생물학이 사람들에게 저지른 위대한 장난은 다른 사람에 관해 뭔가 알기 전에 친밀해지기부터 한다는 거야. 첫 순간에 모든 걸 이해하는 거지. 처음에는 서로의 거죽에 이끌리지만 동시에 직관적으로 전체를 다 파악해...” (p.27)


소설은 예순 두 살의 대학 교수이자 TV 등에 출연하며 지역의 유명인사이기도 한 데이비드 케페시의 노년을 다루고 있다. 그는 한 번 결혼하였으나 자유로운 분위기의 60년대 그만큼 분방한 생활 중에 이혼하였고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매년 신입생 중 대상을 고르고 그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그, 이번에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쿠바 태생으로 스물 네 살의 콘수엘라이다.


“... 이 아이, 이 여자 공작의 젖가슴은 D컵짜리로 정말 크고 아름다웠어. 피부는 아주 흰색, 보는 순간 핥고 싶어지는 피부야. 극장에서, 어둠 속에서, 아이의 고요함이 주는 위력은 엄청났어. 그런 상황에서 흥미진진한 여자에게 어떠한 에로틱한 의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더 에로틱한 게 어디 있겠어?” (p.30)


노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의 특징은 (박범신의 《은교》가 얼핏 떠올랐다) 자의적인 속박인 것일까. 아니면 그 속박 이후의 현학적인 (때로는 노골적인) 자기 합리화일까. 격정이 사라진 자리에, 그 불탄 흔적 위로도 여전히 고개를 들이미는 거죽에 덧입혀지는 말의 성찬들은 받아들이기에 언제나 힘겹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그래온 것처럼 콘수엘라를 선택하였지만 그것이 온전히 데이비드의 선택이기만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질투. 불확실성. 아이의 몸 위에 올라가 있으면서도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숱하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도 한 번도 알지 못했던 강박. 콘수엘라와 함께 있을 땐 다른 누구와 있을 때와도 다르게, 자신감이 곧바로 쭉 빨려나가고 말았어.” (p.40)


애초에 둘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도식적인 관계로 접어들지 않는 한 용인될 수가 없는 것이기에, 어쩌면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한 둘의 관계는 일년 반이 지났을 때 끝이 난다. 데이비드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녀에게 다시 연락하고 싶은 욕망을 겨우겨우 참아낸다. 그렇게 팔 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 서른 둘의 콘수엘라가 다시 연락을 해올 때까지...


“... 사실 즐거움이 우리의 주제잖아. 자신의 수수하고 사적인 즐거움에 대해 어떻게 평생 진지한 태도를 유지할 것인가.” (p.34)


데이비드에게 학생들과의 사랑은, 방종과 일탈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일종의 길티 플레저였던 것일까, 소설 중간 중간 그가 연주해내는 피아노곡처럼 그를 고양시키는 어떤 행위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칠십 살의 데이비드와 유방 절제 수술을 앞둔 콘수엘라의 재회 혹은 소설 속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 재회 이후의 두 사람의 관계는 또 어떻게 진행이 될까... 그렇게 우리는 무수한 물음들을 어쩌지 못한 채 끌어안고 ‘죽어가는 짐승’이라는 사실만 확실하고...



필립 로스 Philip Roth / 정영목 역 / 죽어가는 짐승 (The Dying Animal) / 문학동네 / 190쪽 / 20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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