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히 박힌 소설 속 가치판단의 법적 준거틀을 너머 인간에게로...
법은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의 다양한 문제들을 얼마나 분별력 있게 다루고 있을까? 법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그 텍스트의 해석이라면 그 해석자인 판사의 분별력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법이 종교적 신념과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 법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적 세계관의 자장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은 이번 소설을 통해 (역시?) 이처럼 골치 아픈 가치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 소란 행위를 굽어보며 충고하고 심판하는 일을 하며 살아왔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혼하는 부부들의 악의적이고 터무니없는 태도에 고매한 논평을 하던 자신이 이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곳으로 내려와 그 삭막한 흐름을 따르고 있었다.” (p.72)
하지만 이언 매큐언의 장점은 이처럼 골치 아픈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우리들 바깥에 덩그러니 놓아두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법의 해석자로서 지금까지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해 온 쉰 아홉 살의 여성 판사 피오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곧 그녀를 곤혹스러운 상황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 난감한 상황이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잭의 당돌한 선언이다. 잭은 만족스럽지 못한 피오나와의 육체관계를 문제 삼으며, 삼십 대의 여성과 정열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노라고 말한 것이다. 자신은 아직 피오나를 사랑하고, 피오나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는 첨언과 함께...
“... 그리고 그때, 자신이 잭의 귀환에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정말 단순했다. 그건 실망이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오래 나가 있었으면 했던 마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단지 실망.” (p.178)
수없이 많은 이혼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내렸던 피오나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문제가 되었을 때 그녀는 판사로서만 생각하지 못한다. 잭이 며칠 동안의 외유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그녀에게는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난제가 발생한다. 자기 결정권을 지닌 성인이 되는 열 여덟 살을 얼마 남기지 않은 (수혈을 거부하는 교리를 가진) 여호와의 증인 소년 애덤에게 강제적으로 수혈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병원 측과 이를 거부하는 소년 그리고 (역시 여호와의 증인 교도인) 그 부모 사이의 분쟁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수혈을 거부하게 되면 소년은 죽게 될 수 있다. 설령 다른 치료법으로 살아남는다 하더라고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본 법정은 도덕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장소이며 우리 앞에 놓인 유일무이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법리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요,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p.42)
결국 피오나는 직접 소년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소년에게 강제적으로 수혈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판결한다. 피오나는 애덤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보다 애덤의 생명을 더 우위에 두었다. 성인으로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점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애덤은 수혈을 받았고 무사히 치료할 수 있었다. 또한 집으로 돌아온 잭과 피오나 사이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회복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꼬인다. 감수성이 충만한 애덤은 수혈 이후 부모와 마찰을 빚고, 피오나에게 집착하게 된 것이다. 애덤은 병이 재발하였고 이번에는 수혈을 거부한다. 애덤은 열 여덟 살이 되었고 이번에는 병원 측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애덤은 죽었다.
“그들은 어두한 방에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침실 밖에서 빗물에 씻긴 거대한 도시가 부드러운 밤의 리듬 속으로 가라앉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느끼는 수치심과 다정한 그 소년이 지녔던 삶의 열정과 그의 죽음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p.289)
도덕과 법, 종교와 법, 법의 내부와 그 외부의 현실 사이에 촘촘히 박힌 가치판단의 준거들 혹은 그 준거들에 거세게 휘말리는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인 인간...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법 혹은 판사의 메시지가 등장하고 그러나 다시 그 중심에는 인간... 인간에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관계들과 그로 인한 갈등으로 인하여 법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제 그 법이 관계 앞에서 무력할 수 있고, 결국 그 관계의 핵심인 인간에게로 회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언 매큐언 Ian McEwan / 민은영 역 /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 한겨레출판 / 295쪽 / 2015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