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통하고 있는 한일 기득권 세력들의 정치 사상으로 암울하기만 한
*2015년 11월 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늘,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고시가 강행되었다. 백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 자신들에게 거북하다고, 칠십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한 판단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오십여 년 전의 역사에 대한 평가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진행된 일련의 조치들에 대한 (그들 편에서 보자면) 일차적 성과물이 나온 것이다. 자신의 생각은 올바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틀린 것이 되어 버리는, 강요된 사상에 억지로라도 동조하는 것이 사회 통합이 되고 구성원 간의 화해가 되어 버리는 비틀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되었다. 효도인지 복수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인지 알 수 없는 대통령의 고집이 또 승리 하고 있는 중이다. 충과 효를 최대의 가치로 여기는 봉건제 가치관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일부 지역과 일부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 흔히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불리는 이들 표밭이 버티고 있는 한 우리 대통령의 레임덕 없는 꾸준한 승리가 예상되어 소름이 끼친다.
“... 이들이 조국을 잘못된 길로 이끈 당사자들입니다, 선생님. 그들이 마땅히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게 옳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비겁합니다. 그리고 나라 전체를 대표해서 그런 과오를 저지른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비겁한 짓임에 분명하고요.” (p.78)
사실 국정화 소란으로 계속 번잡스러워지는 마음에 미약이라도 뿌려보는 심산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세상을 부유하는 화가》라는 제목과 가즈오 이사구로 라는 작가 이름을 보고 사소설 경향의 예술가 소설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그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소설은 우리가 일제 식민지를 겪던 시기를 전후한 일본 본토 내의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니까 소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는 일본, 그 일본에서 전쟁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더 빠르게 만드는 데 일조했던 한 예술가의 회고담 같은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온통 괴상하고 경박한 생각들이 만연해 있네. 그러나 이제 마침내 일본에 더 훌륭하고 당당한 정신이 발현되고 있는데, 바로 자네들이 그 정신의 소유자란 말일세. 실제로 자네들을 바로 그 새로운 정신의 최선봉으로 인정받게끔 만들고 싶은 게 내 바람이라네.” (p.101)
소설은 일본이 패망 후 3년여의 시간이 흐른 1948년에서 1950년까지의 기간 동안을 시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화가인 마스지 오노는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가던 시기, 애국심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애국 그룹의 마쓰다를 만나면서 자신의 화풍을 수정한다. 그는 이후 승승장구하면서 자신을 추앙하는 제자 그룹을 거느리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고, 마스지 오노는 이제 자신의 언덕 위 집에 지내고 있으며,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 한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감과 권위가 틀림없이 있다. 어쨌든 신념에 차서 저지른 실수는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p.171)
하지만 그러한 그를 언덕 위의 집에만 머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둘째 딸 노리코의 혼사 문제이다. 한 해 전 노리코의 혼사가 깨진 경험이 있다. 오지는 그것이 자신의 과거 전력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독려하던 그의 행보가 당시에는 그에게 권력을 주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독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이제 새롭게 노리코의 혼사를 추진하면서 자신의 과거의 판단이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상대방과의 상견례 자리에서 고해한다. 그렇게 노리코는 무사히 결혼을 하고, 오지는 평화로운 노년을 유지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네...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저 마지막에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이었음이 드러난 것뿐일세. 평범한 사람들은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없지. 그런 시기에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은 그저 우리가 운이 없었을 뿐일세.” (p.267)
하지만 오지의 회한에 잠긴 현재를 의심 없이 바라보게 되지는 않는다. 위의 말은 오지를 조금은 다른 세계로 이끌었던, ‘부유하는 세상’으로부터 현실 전쟁과 애국의 세계로 이끌었던 마쓰다가 오지에게 남긴 말이다. 그리고 마쓰다와 오지는 그리 다르지 않은 부류이다. 마쓰다는 오지에게 변명하지 않고, 오지 또한 마쓰다에게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그 전쟁의 기억으로 은밀히 내통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우리에게 미친 그의 영향력이 단순히 그림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세월을 통틀어 우리는 그의 가치와 생활 양식에 거의 일치해서 살았다. 그리고 이는 이 도시의 ‘부유하는 세상’ - 우리의 모든 그림에 배경이 되어 준 술과 여흥과 쾌락의 밤세계 - 을 탐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의미했다...” (p.194)
소설을 읽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근현대사, 그 격랑 속의 선조들이 떠올랐다. 일본에 전쟁의 책임이 있는 전범들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친일의 책임이 있던 인사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은 전쟁 책임이 있는 자의 후손이, 그리고 한국은 친일의 책임이 있는 자의 후손이 정부 수반으로 있다. 소설 속 마쓰다와 오지가 서로를 향하여 아직도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화해하는 것처럼, 어쩌면 현재 일본의 기득권 정치 세력들은 여전히 그리고 은밀하게 내통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에 드러나지 않던 그 연결 고리들이 이제 일본과 대한민국의 우경화라는 모습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반성하는 대신 역사를 지워 자신들의 책임을 사라지게 만들기로 작당이라도 한 듯하다. 반성을 자학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굳게 손을 마주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둘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고시되기 하루 전, 한일정상 회담이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도 손을 잡았다. 2015년 11월에 일어난 일들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 김남주 역 /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An Artist of the Floatig World) / 민음사 / 282쪽 / 2015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