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좋지 않아서 겨우겨우 ‘좋은 사회’가 되는 아이러니 가득한 희망.
첫 번째 <사랑과 성>, 두 번째 <경험과 기억>, 세 번째 <유대교와 양가감정>에서 마지막 열 번째 <행복과 도덕>에 이르는 열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인터뷰집이다. 인터뷰어는 스위스 취리히 출신의 저털리스트인 페터 하프너이고 인터뷰이는 2017년에 사망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2016년에 페터 하프너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집을 방문하며 머물면서 진행한 인터뷰이니 어쩌면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육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제 삶의 역사에서 저는 한 마리 새에 불과했습니다. 조류학자가 아니라 한 마리 새요. 지나왔던 아슬아슬한 상황에 대한 저의 경험이 제가 무엇을 보았고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는 통속적인 견해에 제가 무언가를 덧붙여 말할 자격은 정말이지 없다고 느낍니다.“ (p.40)
지그문트 바우만은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용어로 명명되는 인물인데 스스로를 ‘한 마리 새에 불과’하다고 지칭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나름의 준거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를 추앙하는 이들은 그를 ‘조류학자’로 여기고 싶을지 모르지만, 구십 세에 이른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을 한 마리 새에 비견하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러한 인상 깊은 혜안은 얇은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 민족주의에 대한 치료법을 또다른 민족주의에서 찾으려는 건 터무니없고 소름 끼치는 생각입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은 민족주의가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겁니다...“ (p.60)
“인간적인 점령은 없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 또한 역사 속의 다른 점령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모든 점령은 부도덕하고 잔인하고 파렴치하다. 억압당하는 민족만이 아니라 점령하는 자도 화를 입는다. 점령은 점령하는 자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쇠퇴하게 한다.” (p.60)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은 강력한 시오니스트였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반시오니즘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과 현대판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된 팔레스타인, 그렇게 여태 현재진행형인 중동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위의 문장들을 거부하기 힘들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내부자라고 할 수 있으니 더더욱 시선이 간다.
『그러나 지식인은 사회적 담론에서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유렵과 아메리카에서 만연해 있는 포퓰리즘 때문에 정치적인 논쟁에서 사실관계는 그 중요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지만 중요할 뿐입니다.
저는 기자님보다 더 회의적입니다. 진실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이제 정치는 진실이 아닌 권력의 문제입니다. 그저 권력 획득에 도움을 주면 좋은 거죠. 다른 방식의 정치는 없는 겁니다.』 (p.66)
정치 일반에 대하여 기대를 접어버린 상황은 세계적이 석학이나 일개 시민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은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되었다. 한 발 나아가 AI로 만들어진 영상을 날개로 달고 삽시간에 퍼지는 거짓 사실들은 포퓰리즘에 또다른 총탄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중이니 ‘진실을 찾는 이들’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 국가에 걸었던 희망은 박살이 나버렸지만 대체할 수 있는 부품이, 대체 이데올로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시장의 이데올로기였죠. 시장의 역량을 믿자, 규제를 없애자, 안정성에서 유연성으로 나아가자, 그리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이야기였죠. 우리의 정치인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시장은 해법을 찾아낼 것이다.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을 기억하십니까? 밀턴 프리드먼 같은 미국인 경제학자나 키스 조지프 같은 영국인 정치가가, 그러니까 신자유주의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상황을 이끌었습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프랭크 파킨이나 미국의 경제학자 역사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 같은 사람들이 닥쳐오는 위험과 갈등에 대해 일찍이 경고했죠.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규제를 없애면, 사유화하면, 모든 것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넘기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죠.” (pp.110~111)
실은 나는 지금을 개탄할 때 그 결과의 근원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고 종종 이야기 하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국가의 기능이 약화되는 시점에 이를 대신하는 이데올로기로 제공된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새로운 시장질서가 30년 동안은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이제는 국가와 시장 양쪽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황이고, 때문에 과거보다 더욱 위중한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 신자유주의적인 새로운 시장질서도 30년 동안은 아주 원활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우체부는 우편함에 새로운 신용카드 카탈로그를 매일같이 던져 넣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수중에도 없는 돈을 쓸 수 있었죠. 우리 모두는 매혹된 상태에서 이를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입으로 신용카드를 쑤셔 넣었죠. 그렇게 잘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마법과 같은 해결책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신용 체계가 무너졌고, 2007년과 2008년에는 은행이 붕괴했죠. 이렇게 우리는 역사 속 두 번째 희망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건 30년대 그리고 70년대의 위기와는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국가도 시장도 믿지 않기 때문이죠... 통제되지 않은 시장은 위험하고 국가는 무능합니다. 하지만 누가 행동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이 같은 문제를 다루는 사이 위기는 심화되고, 심화된 위기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경쟁하는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나아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그 자체에 사형 선고를 내리고 있죠.” (pp.111~112)
그런가하면 오늘 김명인 선생의 페북 글에서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강제하는 인간형은 기존체제의 성격에 의문을 갖는 대신 자신의 능력에 의문을 갖는 인간형이다. 패배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책임이며 위너만이 시민권을 갖게 된다.’ 라는 문장을 보았다. 이 또한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 현재의 다양한 문제적 결과를 짐작케 한다. 제대로 된 자본주의의 이식 없이 곧바로 신자유주의로 넘어간 우리 사회는 오죽하랴 싶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태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짧게 보면 비관주의자이지만, 길게 보면 낙관주의자이다.“ 상당히 현명하죠.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있죠. 길게 보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합니다. 다른 태도는 카리브해 자메이카 태생의 영국 사회학자 스튜어트 홀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는 문화학의 창시자이자 문화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엄청난 기여를 했던 흑인입니다. 제가 1971년에 영국으로 왔을 때만 해도 문화라는 관념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학생이 아니라 동료에게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설명해주어야 했습니다. 학계에는 문화라는 개념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스튜어트 홀은 문화적 요소를 사회학적 사고 안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식에 있어서는 비관주의자이고 의지에 있어서는 낙관주의자이다.“』 (p.163)
가끔 주변의 동료들과 우리 사회를 비관적으로 이야기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비관의 정서는 전세계를 상대로 하여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그 다음에는 모자란 사회주의를, 또 그 다음에는 절충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가까스로 롤모델 삼을 수 있었지만 이제 모두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그저 트럼프나 르펜 같은 이가 더 이상 함을 갖지 않기를 소망하는 수밖에 없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제가 모든 세계 중에 최고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대안에 대한, 더 낫고 더 정의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저는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닙니다. 저는 자신을 ”희망하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pp.163~164)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을 ‘희망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어쩌면 억지로 끌어올린 희망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품으면서 거의 희망을 우리 또한 끌어다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사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좋은 사회’는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답하고, 충분히 좋지 않아서 겨우겨우 ‘좋은 사회’가 되는 아이러니 가득한 희망이나마 놓칠 수는 없으니까.
『선생님께서는 20세기의 전체주의적 사회체제를 체험하셨습니다. 이전에는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에, 이후에는 후기공산주의적 동유럽에 계셨고, 이제는 다문화적, 후기 근대적, 자본주의적 영국 사회에 계시죠. 좋은 사회는 무엇인가요?
저는 이제 좋은 사회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좋은 사회는 우리는 아직 충분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겠죠.』 (p.181)
페터 하프너 / 김상준 역 /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지그문트 바우만의 마지막 인터뷰 / 마르코폴로 / 182쪽 / 2022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