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치 않은 삶의 비의를 온전히 제 삶으로 드러내고야 마는...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가 사용하는 아이디는 kosinski 이다. 폴란드 출신 미국의 소설가인 저지 코진스키 Jerzy N. Kosinski에서 따왔다. 마침 하이텔을 시작할 때 내가 읽고 있던 소설이 코진스키의 《눈먼 데이트》였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편 <Being There> 이다) 그리고 나는 코진스키의 작품 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 태어난 후 전쟁을 겪으며 유랑하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소설 같은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 자본주의 체제로 망명하고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다가 스스로 마감한 그의 삶이 가지는 희귀성에도 반한 참이었다.
코진스키 이외에도 전기 작가이며 〈체스〉와 같은 훌륭한 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 또한 작품과 삶을 동시에 경이롭게 바라보는 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츠바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애국주의적 정서에 동조하다 이후 로맹 롤랑과 함께 평화주의를 접한 이후 평화주의를 주장하였으며, 히틀러의 독일이 맹위를 떨치자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과 미국을 거쳐 브라질로 도망치듯 옮겨갔고 자신의 부인과 손을 잡은 채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최근에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리모노프라는 실존 인물이 살아낸 (아직 그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아직 그는 살아있다) 삶에 눈길이 갔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미국과 프랑스를 거치며 작품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러시아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그의 행적이 꽤 신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막 로맹 가리의 회고록을 읽었다. 로맹 가리라는 본명과 에밀 아자르라는 정체를 속인 필명, 두 이름으로 모두 콩쿠르 상을 수상하는 진기한 기록을 가진 인물 정도로 파악하고 있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이 또한 만만치 않다.
1914년 러시아에서 출생, 본명은 로만 카체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거쳐 1928년 14세 때 프랑스 니스에 정착, 1933년 19세 때 엑상프로방스 법과대학 입학하였고 여러 출판사에 소설 『죽은 자들의 포도주』를 투고하였으나 거절 당함, 1934년 20세 때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 1935년 21세 때 유력 문예지 『그랭구아르』에 단편 소설 「소나기」 게재하였고 같은 해 프랑스인으로 귀화, 1938년 24세 때 공군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장교 임관에는 탈락, 1940년 26세 때 자유 프랑스 공군에 자원 입대하여 아프리카로 이동, 1941년 27세 때 어머니 나나 카체프가 암으로 사망하였으나 로맹 가리 본인은 알지 못함, 1944년 30세 때 첫 번째 장편소설 『유럽의 교육』이 런던에서 ‘분노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같은 해 일곱 살 연상의 레슬리 블랜치와 결혼, 1945년 31세 때 종전이 되었고 『유럽의 교육』 프랑스어판 출간 되었고,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감, 1947년 33세 때까지 불가리아 소피아 주재 프랑스 대사 서기관으로 근무, 1942년 32세 때 장편 『튤립』 출간, 1945년 35세 때 장편 『거대한 옷장』 출간, 1951년 37세 때 그의 성 ‘가리Gary'가 합법화되었고, 1952년 38세 때 장편 『낯의 빛깔들』이 출간, 1954년 40세 때까지 유엔 프랑스 대표단 대변인 겸 언론 담당 공보관을 지냈고 1956년 42세 때는 볼리비아 라파스 주재 프랑스 대사관 영사로 재직, 같은 해 장편 『하늘의 뿌리』를 출간하였고 이 작품으로 콩쿠르상 수상, 1958년 44세 때 포스코 시나발디라는 가명으로 장편 『비둘기를 안은 남자』를 출간, 1960년 46세 때 장편 『새벽의 약속』 출간, 1961년 47세 때 레슬리 블랜치와 이혼하였고 외교관직에서 물러났으며 희곡 『조니 쾨르』 출간, 런던에서 영어로 쓴 소설 『탤런트 스카우트』 출간, 1962년 48세 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가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출간, 1963년 49세 때 장편 『레이디』를 출간하였고 같은 해 영화 배우 진 세버그와 결혼, 1964년 50세 때 미국에서 장편 『스키광』 출간, 1965년 51세 때 산문집 『스가나렐을 위하여』 출간, 1966년 52세 때 『탤런트 스카우트』의 프랑스어판인 『별을 먹는 사람들』 출간, 1967년 53세 때 장편 『징기스 콘의 춤』 출간, 1968년 54세 때 영화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를 감독하였고 같은 해 진 새버그와 이혼하였으며 장편 『죄 지은 머리』를 출간, 1969년 55세 때 『스키광』의 프랑스어판인 장편 『게리 쿠퍼여 안녕』 출간, 1970년인 56세 때 『튤립』의 최종본인 장편 『흰 개』 출간, 1971년 57세 때 장편 『홍해의 보물』 출간, 1972년 58세 때 장편 『유로파』 출간하였고 같은 해 영화 「킬」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1973년 59세 때 장편 『마법사들』 출간, 1974년 60세 때 샤탄 보가트라는 이름으로 장편 『스테파니의 머리들』을 출간하였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그로칼랭』을 로맹 가리 본명으로 『밤은 고요하리라』를 출간, 1975년 61세 때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장편 『자기 앞의 생』 출간하였고 이 작품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로맹 가리 본명으로 장편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출간, 1976년 62세 때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장편 『가면의 생』 출간, 1977년 63세 때 로맹 가리라는 본명으로 장편 『여자의 빛』과 『영혼 충전』 출간, 1979년 65세 때 1952년에 출간된 『낮의 빛깔들』을 『서정적 광대들』이란 제목으로 재출간하였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장편 『솔로몬 왕의 고뇌』 출간, 1980년 66세 때 로맹 가리라는 본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장편 『연』 출간하였고 같은 해 12월 2일 권총 자살...
그가 죽고 난 다음 해인 1981년 7월, 에밀 아자르가 실제로는 로맹 가리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밝히는 글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 출간되었다. 그는 자신이 생을 마감하던 날 이 글을 로베르 갈리마르와 자신의 변호사에게 보내어 이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997년에 드골에 관한 그의 산문집 『프랑스였던 그 사람에게 바치는 시가』가 출간되었고, 2014년에는 로맹 가리의 처녀작이지만 출간되지 않았던 『죽은 자들의 포도주』 그리고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 라디오-캐나다의 「말과 고백」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구술한 내용이 회고록으로 만들어져 『내 삶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대담 초반부에서 나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분명 우리는 삶에 조종당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미디어를 통해, 여러분의 카메라를 통해 대중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라는 기이한 현상은 사실 인간의 실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쨌든 작가의 창작물과 작가 자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최고의 것을, 자기 상상에서 끌어낸 최고의 것을 책 속에 담고 그 나머지, 앙드레 말로의 표현대로라면 “한 무더기의 보잘것없는 비밀”은 홀로 간직하지요.』 (pp.109~110)
활자화된 로맹 가리의 말을 읽으며 저지 코진스키와 슈테판 츠바이크와 리모노프를 동시에 떠올렸다.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 이라는,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 는 그의 말에 부합하는 인물들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로맹 가리와 저지 코진스키와 슈테판 츠바이크는 모두 자살하였고, 리모노프는 비밀스러운 은신처에서 살아간다. 삶이라는 것은 참...
로맹 가리 Romain Gary / 백선희 역 / 내 삶의 의미 (Le Sens de ma vie) / 문학과지성사 / 135쪽 / 2015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