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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 《어떤 날들》

과거로부터 인화된 사진처럼 박제된 채로만 존재하였던 어떤 가족의...

by 우주에부는바람

2008년 발표한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인상적이었다. 그 책에 실린 단편들이 보여주던 우리들 일상을 찌르는 시선이 이번에는 장편으로 펼쳐지고 있다. 미국의 남쪽 휴스턴에 사는 한 가족, 그러니까 엘슨과 케이든스 부부, 그리고 이 부부의 장성한 자녀인 오빠 리처드와 딸 클로이를 주인공으로 한 가족 소설은 작가 앤드루 포터의 시선 안에서 그리 평화롭지 않다. 소설은 위태롭게 유지되는 듯 하던 엘슨과 케이든스의 부부 생활은 얼마 전 이혼으로 파국을 맞이하였음을 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 가족 식사. 둘 다 싫어했고 둘 다 경멸했던 시간. 식탁 끝에 앉아 고기를 잘라 나누는 아버지와 남편을 사랑하는 척 그 옆에 앉아 있는 엄마. 식탁의 반대편 끝에 고분고분하게 앉아 잘 관리된 가정이 관리된 자녀인 척 하는 두 사람. 그건 최고의 위선이었다. 그런 가족 식사 시간들. 최고의 가식.” (p.41)


그리고 그 후 엘슨은 로나라는 젊은 대학원생과 연애를 하는 중이다. 케이든스는 집에서 엘슨을 몰아냈지만 매주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아들 리처드는 박사 과정 진학을 앞두고 마이컬슨 교수의 집에서 진행되는 워크샵에 참가하고 있지만 왠지 이 교수가 부담스럽다. 그리고 클로이, 휴스턴을 떠나 진학한 대학에서 인도계 학생 라자와 연애를 하고 있던 클로이에게 문제가 생기면서 이 가족은 또 다른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 한동안 그것은 그들만의 의식, 그들을 한가족으로 묶어주는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엘슨은, 그것만 지속되었다면, 매주 한 번씩 다 같이 하던 식사처럼, 그런 시간을 의무적인 일로 삼았더라면, 그것만으로도 가족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434)


이혼을 하였지만 사라진 딸 앞에서 결국 부부는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오빠인 리처드는 여동생인 클로이와의 우애를 부모에 대한 믿음보다 더욱 깊게 생각한다. 이혼이라는 도구로 가족의 외피에 상처를 준 부모,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덜너덜해진 가족의 외피에 둘러싸인 이들 남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리처드의 선택 또한 이들 가족의 해체를 어쩔 수 없이 가속화시킨다.


“... 엘슨은 이 모든 것이 현대인의 삶, 이 시대 가족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묘한 증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갈가리 찢어진 가족이 있고 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들이 있고 욕실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전처가 있으며 딸은 감옥에 갈 가능성이 아주 큰 상황인데, 그런데도 자신이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사실에,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본인들은 깨닫지 못해도 그들이 자신을 의지한다는 사실에 단순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p.445)


어쩌면 이 가족 해체 가속화의 원인은 클로이와 라자에게 있었던 대학에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피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피할 수도 있었던 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클로이와 라자의 관계는 더욱 곤고해진다. 그리고 아마도 둘 사이의 사랑은 또 하나의 가족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가족의 파쇄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가족의 창조 또한 좀처럼 피할 수가 없다.


“... 그는 그녀의 우려가 여러 가지 면에서 타당하다고, 어떤 차원에서 그는 늘 케이든스를 사랑할 거라고, 그의 일부는 늘 그들이 과거에 누렸던 삶을 되찾겠다는 생각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불가능하지만, 리처드는 추운 중서부로 가서 잭 케루악이 되겠다고 애쓰고 있지만, 클로이는 어느 외국에서 가명을 쓰며 살고 있지만, 그는 곧 갓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되겠지만, 그들의 삶이, 그리고 지난 육 개월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이 이제는 되돌릴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시간의 개념에 저항하며 과거로 돌아가려 애쓰는 자신을 깨달았다.” (pp.537~538)


딸 클로이의 실종 사건이 덧대어지면서 잠시 봉합되는 듯하던 이 가족의 해체는 그렇게 불가피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제 ‘가족이라면 으레 한다고 믿는 것, 가족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배운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기록되는 가족의 식사 장면, 그렇게 과거의 한 순간으로 인화되고 박제되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가족의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앤드루 포터 (Andrew Porter) / 민은영 역 / 어떤 날들 (In Between Days) / 문학동네 / 551쪽 / 20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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