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라진 시절에 횡행하던 거짓말의 한 유형...
“그 여름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해 생각한다. 겁 많은 ‘자살 수집가’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짓말로 견뎠다. 이제는 안다. 이런 거짓말은 나쁘다는 것을 하지만 나빠서 더 좋은 것도 있는 법이다” (p.17)
이런 식의 말장난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는 아니고, 십여 년 전 또는 이십여 년 전, 쯤의 이야기이다. PC통신이 등장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제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하던 시기, 혹은 그러고 십여 년이 흐른 후쯤까지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 시기를 ‘사라진 시간’ 혹은 ‘그 시간’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멀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내 옆을 가까이 스쳐 지나거나,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기억의 저 아래 서랍에서나 발견되는 ‘사라진 시간’, 작가는 ‘그 시간’의 한 켠을 끄집어낸다.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 이게 솔직의 뜻이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짓말을 즐겼고, 늘 뭔가를 숨겼으며, 바름을 혐오했고, 곧은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불투명한 사람이 좋았다. 어떤 투명함은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p.33~34)
'그 시간‘이 겹쳐진, 바로 그 시절에는 거짓말과 거짓말 아닌 것이 동시에 횡행했던 것도 같다. 많은 것들이 모호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시절의 태도들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앞서 이야기한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나빠서 더 좋은 것도 있다는 류의 말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모호함이 그렇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쁜 경계들, 잘게 나뉜 생각의 구획들이 서로를 향해 침을 뱉는 빈번한 참사들로 얼룩진 세상보다는 나았나, 되짚어 보게는 된다.
“... 거짓말은 습관 같은 거다. 나도 모르게 검지로 코를 후비는 것처럼,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파자고 결심해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검지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은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나면 배가 아주 고파졌다... 그럴 때 나는 파이애플을 먹었다...” (pp.76~77)
그 시절의 우리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고는 했다. 그 시절은 그러니까 자신을 말끔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좋은 혹은 않아도 되는 시기였다. 지금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가 완전히 맞닿아 있지 않았다. 지금보다 작았지만 더욱 온전히 익명으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렸다. 거짓말의 정체는 혹은 허기의 정체는 아니 거짓말을 하고 또 해도 풀리지 않는 허기의 정체는 그 욕망의 정체이기도 하였다.
“듬성듬성 난 털을 다른 여자들에게 보이는 게 싫었다. 털이 난 것도 아니고 안 난 것도 아닌 모습을, 일을 야무지게 하지 못하는 일꾼이 털을 뽑다 만 칠면조처럼 보였다.” (pp.102~103)
소설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나는 간혹 등장하는 철지난 위악, 그리고 그 위악을 담아내는 유머들에서 그 시절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을 한참 읽고 나서야 중간에 등장하는 채팅 문구들을 보고서야, 아, 이 소설이 바로 그 시절을 시간 배경으로 삼고 있네, 알아차리기도 하였다.) 직접적으로 PC 통신 서비스 중 하나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끝까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키스는 달콤하지 않았다. 창틀을 핥는 기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창틀과 창문 사이에 있는 먼지 맛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p.227)
소설을 통해 그 시절과 입맞춤이라도 한 것 같지만 독자인 나는 달콤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나와 미구씨와 아빠를 비롯하여 사라진 언니를 (혹은 ‘사라진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정체를 하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스포일러일 수도 있어 더 이상 이야기하기 힘든...) 비롯하여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는 그야말로 ‘먼지 맛’이 난다. PC통신의 전화선을 타고 그 시절에는 욕망이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자살 수집의 욕망과도 같은) 흘러 다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욕망의 시원이 통신회사는 아닐 터, 그 욕망의 주인이었던 우리가 아직 살고 있다. 그리고 사라진 언니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듯이, 그렇게 사라진 시절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한은형 / 거짓말 / 한겨레출판 / 331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