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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여름을 지나가다》

우리가 점거하는 시간과 기거하는 공간에 대한 집약 혹은 축약...

by 우주에부는바람

“내가 살았던 집,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혼돈 속에서 살다가 쓸쓸하게 죽었던 오직 나만의 거주지, 여름.” (p.206)


소설은 민이 중얼거리는 위와 같은 말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러니까 소설은 집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집에 기거하였던 여름이라는 한 계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 속의 그것은 우리의 한 삶이 누리는 전 시간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한 삶이 기거하는 모든 집에 대한 작가 나름의 오마주이기도 할 터이다. 소설은 그렇게 6월과 7월과 8월 그리고 그 여름의 끝에 그녀가 혹은 그가 아니면 우리들이 서식하였던 장소, 가구점으로 우리를 이끈다.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타인의 집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면 민은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한 시절 거주한 집은 그대로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집은 존재의 시간을 증명한다...” (p.43)


소설은 두 주인공의 현재의 동선들 따라다니면서 동시에 두 주인공의 과거의 이력에 의지한다. 민은 한때 회계사로 일하였지만 결혼을 약속한 종우가 내부 고발자가 되면서, 그러한 종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결국은 파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동산 소개소에서 일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 혹은 비밀번호를 통해 그 집들을 들락거린다. 가구점은 이러한 그녀가 가장 자주 들러 멈춰 있는 곳이다.


“... 그의 행동은 정의가 아니라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만들어진 허상, 아니면 유치한 과대망상. 그의 정의를 인정하면 자동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그러니까 부도덕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그 상황은 모두에게 껄끄럽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p.93)


하지만 그 가구점은, 이제는 임대료 대신 보증금을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지만, 목수의 것이다 혹은 것이었다, 그리고 수는 바로 그 목수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채워지지 않은 기대로 인하여, 현재는 아픈 몸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스란히 가족들의 몫이 된 빚을 짊어지고 있다. 수는 우연히 손에 넣은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는 쇠락해가는 오래된 쇼핑몰의 옥상에 위치한 작은 놀이공원에서 한 여자와 함께 일을 하지만, 결국 그 여자로부터도 멀어져 민이 점유하고 있는 이곳 가구점으로 들어와 눕는다.


“... 필요하고 열망하는 것이 모두 진열되어 있지만 손을 뻗으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공허하고도 매혹적인 상점. 목수의 흔적 때문일 터였다. 가구점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목수의 손길, 땀 냄새, 성실한 노동, 부푼 기대감, 그런 것들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았지만 민의 비어있는 시간을 늘 아낌없이 채워주곤 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고, 목수는 곧 이 가구점이었다...” (p.146)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였던 민과 수는 그러나 서로 다른 시간으로 서로를 비껴간다는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시간의 양보는 멈추고 그들은 마주친다. 민은 아픈 수를 돌보고, 수의 부탁으로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이제 가구점의 주인은 분명해지고, 두 사람은 가구점으로부터 물러나야 하고, 가구점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여름은 지나갔고,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다.


“... 흘러가는 먼지 속에선 침묵이 각기 다른 모양의 집 한 채씩을 짓고 있었다. 민이 한 걸음씩 들어가자 침묵의 집들은 차례차례 부서졌고, 나태하게 흐트러져 있던 사물들은 원래의 실루엣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단단히 문을 닫았다...” (p.51)


요즘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군의 일원인 조해진의 장편 소설은 그러나 너무 미리 쇠락해 있는 것 같다. 윤기 없는 캐릭터들이 그렇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집약하려고 하였으나, 그것은 집약이라기보다는 축약이 되고 있는 것만 같다. 민과 수라는 두 개의 시선을 이용하고, 이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까지 총동원하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몇몇 문장에 기대어 밀도를 부여하려고만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침묵하자는 수다에 다름없다.



조해진 / 여름을 지나가다 / 문예중앙 / 210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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