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문장에 채워져 있던 빗장이 풀리고...
작가의 문장을 아주 오래 전부터 좋아하였다.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부터라고, 지금의 문장들이 그녀에게 수태되기도 전이라고, 어쩌면 그녀가 잉태되기 이전부터인지도 모른다고 말해두자. 하지만 그곳은, 그 시간은, 그녀의 가슴 아래 그녀만의 공간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좋아하였던 것의 실체를 아주 희미하게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기억이 주검이 되어가는 동안, 일종의 폐쇄된 기도소 같았던 그녀의 문장에 채워져 있던 빗장이 풀렸다.
“... 굴드는 사물이 굴드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사물 자신의 생각을 하고, 굴드 자신은 사물의 사유를 그대로 옮겨적는 필경사이기를, 그러니까 자신의 몸은 사물의 의식을 대신하는 창고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나 사유의 시간은 사라지고 감각과 언어만 남게 되기를 바랐다...” (pp.28~29)
부유하던 문장이 옷가지를 걸치자 육신이 생겼고, 육신이 생기자마자 입을 열었는데, 어쩌면 그 첫 마디가 ‘굴드’였고, ‘굴드’가 거기에 있게 되자, 부유하는 문장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렇게 ‘굴드’와 작가는 소설이 씌어지는 동안 잠시 서로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준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이, 꿈과 현실이, 뚜렷함과 희미함이, 나란히 존재하되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두 개의 세계가, 기도소 문 앞에서 조우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굴드는 살아 있는 배가 아니라 죽어가는 범선에 매혹되었다. 버려진, 버려진 채로 부지런히 침몰중인 범선에. 파도치는 바다가 아니라 모래를 향해 곤두박질치는 범선에. 범선은 한 몸으로 두 개의 세계를 살고 두 개의 세계에서 죽어가는 존재였다.” (p.14)
그곳은, 소설 《코케인》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서성거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굴드, 몰리, 좀머, 페터, 이안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코케인’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별다른 이유 없이도 그곳에 우리는 들어갈 수 있고, 또 나올 수 있다. 비밀스러운 징표 같은 것을 들이밀 필요가 없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 징표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고, 작가는 ‘이 책이 모든 사랑에 관한 은유로 읽히기를 바란다’ 라고 적고 있다.
“... 사랑은 관념이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언어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므로 사랑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순간을 소유하지 못한다. 단지 ‘그’라는 한 인간의 죽음만 있을 뿐이다...” (p.55)
사랑으로 출입 가능한, 빗장이 풀린 그녀의 문장 안에서 평화롭고자 하였던 마음은 그러나 사치이기도 하였다. 죽음은 도처에 있어 저 멀리 오랜 유럽의 심장에서 파열음이 들렸고, 바로 지금 이곳에서도 그야말로 수난이 있었다.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했던 인물들이, 이 도착적이기만 한 현실 앞으로 소환되는 것을 무심코 지켜보아야만 했다. 주룩주룩 내리던 간밤의 비가 책장을 적시는 것도 모른 체 말이다.
“... 굴드는 섬세하고 밀도 높은 문장력을 구사하고 인물의 폐쇄적인 내면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서 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굴드의 인물들은 모두 자폐적이고 소설 전반에서 현실에 대한 시야가 제한되었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그러니까 현실 인식에 있어 한계를 드러낸다고 했다. 굴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굴드가 생각할 때 가장 현실적인 것은 우발성에서 비롯되었다. 우발성이나 우연. 눈이 집에서 나가게 하고 바람이 더 멀리 가게 하고 보다 먼 낯선 곳이 육체와 육체를 만나게 하고 헤어짐으로 이끌고 한낮의 더위가 사표를 쓰게 하고 이별이 성공을 부추기고 질투가 사랑을 죽이고. 사람들을 길 위에 떠돌게 만드는 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그런 현실을 부정하고 그곳에서 떨어져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런 파편화된 모습들을 파고드는 게 현실 인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인지, 굴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p.101)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는 물 속에 관을 심고 그곳에 주검을 집어넣는다. 그런 풍습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이 그 곳에 누워 물 밖을 읽은 시간인 것만 같다. 내 기억의 주검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방법을 백 개쯤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인물과 공간의 북새통인 지금을 살다보면 그런 독서의 방법 백 개쯤 누구나 갖게 될 터이다.
진연주 / 코케인 / 문학동네 / 162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