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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 《사십사》

모멸을 잘 견뎌내거나 모멸인지도 잘 모르거나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거나..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모두들 구리다. 밝고 환한 인물들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두운 인물들인데 그것이 또 눈에 확 들어오는 어두움도 아니다. 찌질하다. 모멸을 잘 견뎌내거나 그게 모멸인지도 잘 모르거나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인물들이 태반이다. 근데 그 인물들을 확 뿌리치기도 쉽지 않다. 그 인물들에서 조금씩 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책에 실린 소설들을 읽었다.


「한 박자 쉬고」

“그가 앞니를 물고 숨을 들이켜며 혀 끄는 소리를 냈다. 뱀이 내는 소리처럼 숨을 들이켜며 스으…... 나는 어렸을 적으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pp.39~40) 21년이 지나 다시 만난 어린 시절의 동창, 잊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다시 복기되는 어떤 하루의 기록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한 때가 저절로 지금으로 소환된다는 어두운 설정, 그리고 과거의 친구와 지금의 친구 사이의 어림짐작이 어려운 간극 등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더 송The Song」

찌질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중년의 남성이 소설 여기저기에 등장한다. (그런 면에서 사십사라는 제목은 전체 소설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집을 나간 아내 그리고 이혼, 갑작스레 걸려온 장례 관련 전화, 송사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 대학교수라는 직책 등 지금의 이 남자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와 함께 이 남자가 떠올린 학창 시절 흰 개에 대한 기억...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

“모든 것이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져갔다. 맨 처음이 다시 기억나려면 지나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남은 생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삶에 너무나 순응적인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 미친 짓이었다...” (p.116) 하여 소설이 사랑에 관한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어린 제자와 함께 동거를 하는 대학교수,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것이 스캔들이 되기에도 어색해진 현재, 찾아온 기회를 위하여 언제나 순응하여 살아온 것처럼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이 남자의 행위 하나하나가 비루하다.


「아내의 시는 차차차」

직장을 그만두고 치킨집을 차렸다가 망한 나는 아내가 주는 용돈을 쓰면서 문화센터의 시창작 교실에 나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언젠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던, 호텔에 함께 들어갔던 여인을 만난다. 나는 오래된 문학지의 시들을 오려 붙여 시를 만들고 그 시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등단을 하기에 이른다. 아내는 그 사이 댄스를 배우러 다니고 나는 별 불만은 없다.


「흉몽」

“누가 내게 이런 짓을 한 것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왜?’가 중요했으나 ‘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툭하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선생님 말이 되질 않잖아요.’ 왜라는 물음은 필연성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소설에서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 필자들은 머쓱해하며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여 원고를 다시 보내왔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소설도 완벽한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없었다.” (p.169) 어느 날 입술을 도둑맞은,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고 있는 그의 입술을 통째로 잘라내 버린 나는 과거에 문학 출판사의 편집인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원고를 보내오는 필자들에게 부렸던 패악,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四十四」

마흔 넷 생일을 맞은 그녀는 아직 혼자다. 삼십대 중반에 이미 교수가 되었고 몇 차례 남자를 만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혼자 살고 있다. 그녀의 외로움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애초에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굳어 버리면 그것은 자의적인 것으로 모습이 바뀌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네 친구」

“화려한 봄의 나날, 세 친구는 학교 잔디밭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제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은수는 혜진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고 있었다. 혜진은 제민의 무릎을 베고 누워 눈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나중엔 늙겠지? 우리만 그대로면 좋겠다. 우리는 좀 다르잖아. 세 친구가 돌아가며 말했다.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pp.263~264) 제민, 헤진, 은수라는 세 친구가 등장한다. 하지만 제목은 ‘네 친구’ 이다. 그리고 김집사가 있다. 지나간 시간들, 왜곡되거나 사라졌거나 할 것인 기억들, 그리고 그 모든 시간들의 총합일 현재가 있다. 세 명의 친구들이 따로 또 같이 보낸 시간들과 지금의 묘한 불협화음의 아름답지 못함을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라진 이웃」

실직 후 술을 마시기 시작한 나를 피하여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나는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시간이 흘렀고 지금 나는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 주민들을 내쫓는 용역일을 하면서 벌어먹고 산다. 그마저도 잘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의 딸 희선은 밖으로 나돈다. 집으로 들고 나는 것을 나는 정확하게 체크하지 못한다. 그런 딸에게 위신을 세울 수도 없다. 딸 희선이 만나는 남자는 내가 용역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청년일 수도 있다. 그 청년과 내가 용역이라는 일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들이 한 곳에서 살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메테오라에서 외치다」

그리스에 봉사 활동을 목적으로 간 이경섭은 그러나 함께 하는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치게 된다. 그들과 이경섭 사이에는 활동의 목적이 다르다. 그들은 종교를 가리지 않고 난민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에 몰두하려 하지만, 이경섭은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자신이 들었다고 믿는 그것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돌아올 수 없는 절벽 위에 선 신세가 된다. 그리고 30년 전, 광주, 여동생의 죽음, 그것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자신, 여동생을 찾아 나섰다 돌아오지 않은 부모, 라는 과거가 있다. 그의 현재는 그가 말하지 못한 것들과 자책감의 또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백가흠 / 四十四 사십사 / 문학과지성사 / 360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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