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 유니크함이 미래의 어떤 스타일을 도모하는 가운데...
*2015년 12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여기저기서 이 젊은 작가의 이름 김엄지가 거론되고 있었다. 단편소설집과 장편소설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것도 그렇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형식의 참신함도 그 거론의 이유로 작동하고 있었다. 궁금하여 두 권을 모두 구매하였고 그 중 먼저 단편소설집을 읽기로 하였다. 단문에 거침없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대문자와 소문자의 이니셜을 섞어 쓰며 비둘기와 여자와 도배와 세금과 영철이와 김수동이 불쑥 등장하고는 하였다.
「돼지우리」
음식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러니까 목 넘김에서 오르가슴을 끌어낼 수 있지만 떡만큼은 싫어하는 리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면접에 떨어져 욕을 남발하던 리라가 갑작스레 이미 취업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고깃집, 그 고깃집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다는 리라의 말에 나는 놀라지만 리라는 태연하다. 한 달 급여 1백만원,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출근, 삼겹살 외 사장 추천 부위 먹을 것, 돼지가 될 때까지 돼지고기를 먹을 것, 계약해지시 월급과 고깃값의 8배 보상, 그리고 신체 변화에 따라 보너스가 지급된다는 사항까지 포함된 채용 계약서에 라라는 만족해한다. 그리고 라라를 채용한 사장이 출현하여 예의 돼지론을 설파한다. 돼지와 돼지고기, 돼지우리와 고깃짓 사장이 거칠게 서로를 목구멍으로 넘겨가면서 유지되는, 이 세상을 향한 멱 따는 소리와도 같은 야만의 소설이랄까...
「삼뻑의 즐거움」
하우스에서 드나드는 도박 중독자 영철, 그리고 어느 날 영철의 하우스에 배달되듯 도착한 아들 팔광... 영철에게는 한 번 뻑을 하면 같은 판에 다시 한 번 뻑을 하는 징크스가 있고, 팔광은 달리기를 잘하여 트로피를 받아오기도 하고... 아들의 트로피를 사수하려 도박판에서 일어난 영철과 돌아오는 길에 자빠지면서 영철의 이마에 박혀 버린 트로피, 그리고 그 트로피에 달려 있던 새의 정체, 씹새...
「기도와 식도」
아버지와 배다른 여동생과 함께 차를 타고 있다 사고를 당하여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나... 깁스를 푸는 순간에야 겨우 확인한 손가락 절단 사실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나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친구 지혜와 남자가 있는 아버지와 무지개 모임의 사람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의 이야기랄까...
「영철이」
김영철은 이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지 않다. 무라면 썰어 먹기라도 할텐데 너란 인간은 그마저도 써먹을 데가 없다면 ‘그냥 무’라고 말하던 아내와 헤어져 지금은 동생 네 얹혀 살고 있다. 영철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던 아내와 그런 아내에게 별반 궁금한 것이 없었던 그에게는 영철이라고 이름 붙인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영철이 실직하고 개 영철이 사라진 후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의 사정」
“그는 밤마다 도배와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밤마다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밤낮 가리지 않고 생각했다. 끊임이 없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배를 하고 나면 자연스레 여자가 생길 것 같았고, 여자가 생기고 나면, 여자와 함께 도배를 하고 싶기도 했다. 여자와 함께 도배를 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지, 그는 몸이 달아오르도록 궁금했다. 그는 벽을 보고 쪼그려 누워 자위를 했다. 특별한 상상이 없는 자위였다. 별 생각 없이 정액을 벽에다 뿌렸다. 그는 정액을 아무렇게나 싸버리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바다의 영향으로 도배에 대한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벽에다 한 번쯤 사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p.128) 그의 사정은, 뭐 이런 식....
「어느 겨울날 - 다른 어떤 것도 아닌」
Y와 나는 동창이고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Y는 김수동에 대해서, Y와 내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김수동에 대해 끊임없이 욕을 한다. 나는 미혼이지만 Y는 이혼을 하였는데, 그마저도 모두 김수동의 탓이 되고 만다. “사거리를 향해 걷는 중에 비둘기로 추정되는 새 두 마리와, 고양이로 추정되는 고양이, 개로 추정되는 개를 한 마리씩 보았다. Y는 그 모두에게 관심을 보이고 욕을 했다. 김수동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Y는 어쩌면 나에게서도 김수동 같은 면을 보지 않았을까...” (p.149)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수심 3미터 이상의 계곡이 있는 산을 찾아 떠난 그... “그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걸었다. 그의 미래에는 눅눅한 이불과 밀린 세금이 있었다. 그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던 중 새롭게 도배를 해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되었다. 그는 깨끗한 흰색으로 도배를 하고 싶었다. 도배를 하고 나면 새로운 여자가 생길 것도 같았다...” (pp.171~172) 그는 산 속 숙소에 머물며 늙은 여자 주인이 그려준 약도를 들고 계곡을 찾아 간다. 처음에는 실패하고, 산에는 불이나고, 다음에는 성공하고, 산에는 또 불이 난다.
「고산자로12길」
E와 동료 a, b, c가 있다. 그들은 일을 하고 상사에게 욕을 먹고 울고 밤이면 서로에게 회식을 제안하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E에게는 헤어진 연인인 백이 있고 백과 문자를 주고 받는다. E는 백의 전 남자 친구를 우연히 보고는 한다. 휴가를 앞둔 그들의 하루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느시」
R과 동료 a, b, c가 있다. 그리고 이전 직장 동료인 e가 있다. 그리고 R은 e로부터 사촌인 초씨를 소개받기로 한다. 초씨는 에어로빅 강사인데 그러나 만나기로 한 날 인대가 끊겨서 R은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 R은 매뉴얼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하는데, 계속해서 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날 매뉴얼을 만들고 말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그거 그렇고, 소설의 제목인 ‘느시’는 윈도우에서 새폴더를 만들 때 나오는 이름이다. (나는 그런 이름을 본 기억이 없어, 실제로 폴더를 새로 만들어봤는데 열 아홉 번째에서 느시, 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느시’라는 새가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있다. 두루미목 느시과의 대형 조류이다. 우리말로는 들칠면조, 라고 한단다.)
주변의 호들갑에 비하여 읽는 재미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근간 나온 다른 한국 소설들과 비교하였을 때 형식적인 유니크함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가 사라진 시대, 혹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모호한 의미마저 사라지거나 왜곡되고 마는 시대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소설의 형태 또한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글쎄, 다...
김엄지 /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 문학과지성사 / 261쪽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