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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언덕에서 태어난 무가치'인 E를 쥐고 흔들어 툭 떨궈야 할 어떤 무의미

by 우주에부는바람

우산, 비, 치과, 이, 여자, 비둘기 혹은 발목이 잘린 비둘기, 쓰레기, 요트와 장미, 실패, 미래, 곰팡이, 휴가, 그리고 출근... 등장하고 사라지지만 다시 등장하고 그러다 불현 듯 사라지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와 단어와 문장들의 이합집산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길지 않은 장편소설이다. 김엄지의 소설집을 읽고 내친 김에 장편소설까지 읽기로 한다. DNA를 검사한 결과 ‘언덕에서 태어난 무가치’로 판명이 나는 E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이야기이다.


‘언덕에서 태어난 무가치’인 E에게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다. 그것도 DNA 판독 결과가 그러니 더더욱 확신하게 된다. E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그런 그를 둘러싸고 있는 a와 b와 c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상사 백 또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로 입사하는 d 또한 낙천적이기는 하지만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그나마 a는 사라질 줄이라도 안다. 하지만 a를 끝까지 생각하는 것은 E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들 a의 부재에 적절히 적응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a가 사라진 이유를 우리들은 모른다.


“세상의 완벽한 실패. E는 길바닥에 엎드려서 세상의 완벽한 반짇고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실패의 기능은 실을 감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길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괜찮아. E는 엎드린 채로 동료들에게 다시 말했다. 그는 좀 쉬고 싶었다.” (p.116)


a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연극 ‘주문과 매력’을 보기는 했다. 그 연극에는 a의 사촌이 조라는 인물로 출연했다. 조는 여배우를 폭행하고 대마초를 피우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연극을 보러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시간 잠을 잤다. 잠을 잘 수 있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관람석이었다. 나중에야 나는 그 연극이 애증, 복수, 권태, 폭력, 불합리의 연극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어쨌든 a는 사라졌다.


“출근길에 E는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결심하고 나자 곧 뿌듯해졌다.” (p.141)


그리고 E는 소설의 마지막 순간 위와 같이 결심한다. 그러니까 출근을 하지 않기로... 그것이 a의 사라짐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넘어져 이가 부서지는 충격 탓인지, 이도저도 아니라 그냥 뿌듯해지고 싶어서인지 (E는 아주 잘 뿌듯해하는 타입이다)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결심한다. 물론 그 결심이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유야무야 며칠 그러다 말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


‘언덕에서 태어난 무가치’인 E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소설이 스스로 무언가를 독자인 내게 건네기를 바리는 것은 무리다. 대신 이 허깨비 같은 주인공 E를 쥐고 흔들어대다 보면 뭔가가 톡 하고 떨어져 또르르 굴러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굴러가는 것이 어쩌면 ‘세상의 완벽한 실패’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실패를 따라가다 보면 뭔가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겠는데, 그것은 독자인 우리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E는 같은 조건에서 태어났고, 언덕의 이쪽과 저쪽에는 그저 작가와 독자가 있는 것인지도...



김엄지 /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 / 민음사 / 142쪽 / 20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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