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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줌파 라히리 《로마 이야기》

몰두 없이도 살아지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도 삶이니...

  최근 이런 생각을 자주 했다. 몰두할만한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몰두할만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몰두할 힘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로마 이야기》에 실린 단편 <P의 파티>를 읽다가 한 친구가 생각나서 오늘 오전 만났을 때 책을 선물하였다. 실은 책을 모두 읽지 않았을 때였고 오늘 모두 읽었다. 마지막 소설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가장 좋았다. 


  「경계」

  “이따금 그녀는 고개를 들고 주변 풍경을 살핀다. 그녀는 저 멀리 초원, 원덕, 숲에 펼쳐진 다양한 빛깔의 녹음을 응시한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노란 건초, 빛바랜 난간과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낮은 돌담. 내가 매일 보는 모든 것을 그녀가 본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것들 말고 무엇을 더 보는지 궁금하다.” (p.20) 이 나라 바깥에서 로마 외곽까지 와 휴양지의 숙소를 관리하는 부모를 둔 나는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이 나라 사람들을 살핀다.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은 이렇게, 작가인 줌파 라히리가 그런 것처럼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자들을 혹은 그들의 시선을 혹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응시와 그들의 응시는 수시로 교환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 소녀들의 어머기나 두고 간 수첩에는 작고 흐릿한 필체의 쇼핑 목록, 그리고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 있다.” (p.30) 


  「재회」

  아버지를 잃은 ‘밝은 색 머리, 큰 녹색 눈’을 가진 상복 차림의 친구와 ‘머리색이 짙고 피부색도 어두운’ 대학 교수 친구가 만난다. 그 재회에 불청객처럼 끼어드는 뿌리 깊은 천연의 편견을 보여주고 있다.


  「P의 파티」

  아내와 나는 매년 (초등학교 이래로) 아내의 친구인 P가 여는 파티에 참석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피티장에서 잠깐 만난 L에게 의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L의 아이는 P의 아이와 동급생이고, L은 남편을 따라 외국에서 로마로 들어와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L과 내 사이에 아무런 진전이 없는 사이에 아내와 L이 먼저 친구가 된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L과의 진짜 러브 스토리? 약속을 잡고 호텔 침대에서 몇 시간 함께하는 것?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께 춤을 춘 뒤에도 나는 그녀의 몸과 손을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테라스에서 나눴던 대화, 그녀가 혼란에 빠져 아들을 걱정하며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때에 집착했다. 그 순간이 나에게는 에로틱한 행위보다 좀 더 위반적인 일처럼 보였다. 우리가 무엇을 공유했을까?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유익하고 친밀한 교환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아내를 공유했다.” (p.82) 삶이 가지는 우연성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의 행방이 언제든 묘연해 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어떤 무안한 순간을 통과한 뒤에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심지어 잘...


  「밝은 집」

  밝은 집, 이라는 제목은 투명하게 전달되는 차별과 편견을 가리키고 있다. 이 부부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안락한 밝음은 형편없이 좌절되면서 어둡게 변한다. 남편은 남아 부랑자가 되고 아내와 아이들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계단」

  “자신이 사는 건물 가까이의 모퉁이를 돌며 시나리오 작가는 평소처럼 시끌벅적한 원형극장 같은 계단을 기대한다. 대신 텅 비어 있는 계단이 보인다... 불 켜진 가로등의 하얀 점들이 마치 크고 넓은 M자를 그리며 계단 주위에 대칭형 별자리를 형성하고 있고 계단 꼭대기에 여섯 개의 보호용 돌기둥이 박혀 있는 게 보인다... 거의 대문에 다다른 마지막 순간, 그는 126개 계단 전체를 모두 오르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오늘 밤 계단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고,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 침대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노력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pp.169~170) 아마도 이 계단을 함께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다섯 명의 인물인 외국인 가사도우미, 미망인, 수술을 받아야 하는 외국인 여성, 이민 2세대 여학생, 동성애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로마에 온 형제, 시나리오 작가가 등장한다.


  「택배 수취」

  나는 주인아주머니를 대신하여 택배를 수령하러 들르지만 기간이 경과하여 반송되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를 탄 소년 두 명에 의해 피습당하는 사건을 겪는다. 하지만 이방인으로 이곳에 들어온 나는 소년들을 신고하지 않는다. 그저 이 도시의 젊은이들이 누리는 행복을 질투할 뿐이다.


  「행렬」

  단순히 축제 행렬을 둘러싼 내외간의 알력처럼 보였지만 거기에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해 보려는 헛된 노력이 깃들어 있다.


  「쪽지」

  쌍둥이 아들을 키웠고 이제는 양장점에서 일하는 여성이 아이들의 초등학교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하여 아이들이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성인이 되어 자신을 떠난 아이들을 회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자신의 아이들의 까마득한 후배일 아이들이 보내는 협박 쪽지에 의해 산산히 부서진다.

  

  「단테 알리기에리」

  어린 시절 내 친구와 연애를 하였던 S는 내게 연애 편지를 보내 실은 자신이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너도 날 사랑하는 거 알아, 라는 마지막 덧붙임과 함께. 그리고 나는 S를 만나 아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나는 어린 시절 돌 아래 사는 생물체를 찾아 시냇물이 흐르는 집 뒤편 숲으로 갔을 때의 외로운 놀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돌들은 무거웠지만 나는 돌을 뒤집어 벌레와 곤충을 찾아냈다. 벌레와 곤충들은 햇살 아래서 몸부림치며 굼틀거렸다. 나는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은 채 두려우면서도 매혹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어두운 갑옷을 입은 살아 있는 생물, 선사시대 곤충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연구했지만 어느 정도까지였다. 생물체를 살핀 후 덮개를 다시 닫아 그토록 열망했던 숨겨진 우주를 평화롭게 남겨뒀다. S는 이야기에 반응하지 않았고, 내게 다른 것을 묻지 않은 채 그저 듣기만 했다. 나 역시 줄곧 그 보이지 않는 생물 중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과 그 연애편지로 그가 나를 덮고 있던 돌을 들어 올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지금 우리의 관계, 적어도 우리 관계의 잠재력이 덮개가 다시 덮이고 잊히기 전에 잠시 동안, 아주 잠시 동안만 노출됐던, 작지만 격정적인 곤충들의 삶과 같았다는 것을 안다.” (p.242) 소설은 단테의 《신곡》의 인용과 함께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사랑과 삶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경험했거나 눈으로 봤거나 실수했거나 세심하게 탐구했던 이야기는 무겁다. 어떤 것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버리는 에너지를 능가한다. 깊은 기억은 시냇물에 비친 수없이 많은 뿌리, 끝없는 복제 같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든 삶과 마찬가지로 특정 지점까지만 지속된다...” (p.272)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을 소설 속의 나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 다음과 같은 질문만 연거푸 한다. “살아남는 법을 배우려면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까? 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p.279)


  삶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러니 끝과 시작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몰두할만한 것이나 몰두할 힘을 찾는 것은 어쩌면 삶은 끝과 시작이 있는 하나의 직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났더니 몰두, 라는 최근의 화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 사는 것만 삶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살아지기 때문에 사는 것도 삶일 수 있다. 


줌파 라히리 Jhumpa Lahiri / 이승수 역 / 로마 이야기 ((Racconti Romani) / 마음산책 / 287쪽 / 20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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