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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얇은 보자기에 싸인 감정들로 뜨거웠던 그 여름에...

  읽을수록 계속 읽을수록, 어느 시점까지는 더더 자극적인 이야기에 끌렸다. 그렇게 읽고 계속 읽어 어느 시점이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에 더욱 눈길이 가게 되었다. 자극적인 더욱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가지는 정형화의 수렁을 들여다볼 수 있게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자극적인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자극적이지 않아 오히려 신선한 이야기들도 있다.


  “나는 아빠가 왜 건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할까 생각한다. 아빠는 진짜 그러면 좋겠다 싶은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창틀에서 까만색과 흰색이 섞인 고양이가 얼핏 움직인다. 딱딱하고 깨끗한 바닥 타일 위로 길게 뻗은 아주머니의 그림자가 내 의자에 닿을락 말락 한다. 킨셀라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서 접시를 여러 장 꺼내더니 서랍을 열고 포크와 나이프, 찻숟가락을 꺼낸다...” (p.17)


  소설은 어린 소녀가 먼 외가 친척에게 맡겨져 보내는 여름 한 철을 다루고 있다. 소녀는 가난한 부모를 두었고 엄마는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이다. 아마도 소녀의 아버지는 약간의 허세가 있는 듯하고 일에 치여 또는 그저 그런 성정 탓에 소녀에게 무심하다. 소녀를 부부에게 맡긴 아버지는 그들이 전하는 몇 가지 식료품은 싣고, 내려 놓아야 할 소녀의 옷가지는 그대로 차에 실은 채로 돌아간다. 소녀는 맡겨졌다.


  “이제 태양이 기울어서 일렁이는 물결에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무서워진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p.30)


  애초에 무심한 아버지 그리고 계속해서 태어나는 아이들 탓에 소녀를 돌볼 여력이 없는 엄마와 소녀를 맡게 된 부부는 곧바로 비교가 된다. 소녀가 맡겨지면서 꿈꾸었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소녀를 씻기고 소녀에게 위험을 알린다. 아저씨는 소녀에게 달리기를 시키고 매일매일 그 시간을 체크한다. 소녀는 관심을 받고, 그 관심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꽤 온전한 형태의 것이라 짐작된다.   


  “나는 아저씨에게 초코아이스를, 아주머니에게는 플레이크 초코바를 주고 뒷좌석에 누워서 딱딱한 껌을 씹으며 차가 덜컹거릴 때 껌이 잘못 넘어가서 숨이 막히지 않도록 조심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잔돈 소리, 자동차와 두사람의 대화를 향해 돌진하는 바람 소리,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앞좌석에서 나누는 동강난 소식들에 귀를 기울인다.” (p.56)


  그리고 그 맡겨진 시간의 중간에 소녀는 마을 주민을 통해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된다. 그들이 잃은 남자 아이, 자신이 맡겨진 첫째날 입었던 옷의 주인에 대해서이다. 글나 그렇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 사실에서 소녀가 느꼈을 감정은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소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을 알게 된 다음의 이 부부의 반응 또한 직접적인 전달의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 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p.96)


  길지 않은 소설이고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데, 읽으면서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주춤하게 된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들은 대부분 얇은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만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그 안의 내용물을 얼핏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아, 이거구나 하고 페이지를 넘어가려는 찰나 정말 그런가 의구심이 든다. 다시 보자기를 들어 적절한 빛을 투과시켜 본다. 그래도 의구심이 말끔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잊고 있던 천진난만한 의구심이다. 



클레어 키건 / Claire Keegan / 허진 역 / 맡겨진 소녀 (FOSTER) / 다산책방 / 103쪽 /  20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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