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무중력, 절묘한 힘이 만들어내는 그 망망대해를 부유하며...
소설을 읽는 동안 종종 의식의 무중력 상태, 라고 부를 법한 상태를 경험하였다. 독서 중의 의식의 무중력 상태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책을 읽고 있기는 하지만 책을 읽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 줄거리를 따라간다거나 인물에 흡착하지 못하는 상태 혹은 단어와 단어 혹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어디쯤인가에서 망망대해에 떠 있기라도 하는 듯 그저 부유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물, 줄거리, 문장, 단어가 제각각 비슷한 힘으로 작용하는 통에 오히려 그것들 중 어느 것으로도 끌려가지 못한 채 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시간의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화자도 계속해서 바뀐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클레르가 있다. 그녀는 마흔 살의 번역가이며 이혼을 했고, 두 딸이 있지만 함께 살지 않는다. 그녀는 사촌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던 라동 선생님을 만난다. 그녀는 또한 그곳에서 그녀의 최초의 남자라고 할 수 있는 시몽도 만난다. 시몽은 결혼을 한 상태이고 그 도시의 시장 노릇을하고 있다. 클레르는 그 방문 이후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라동 선생님이 사용하도록 만들어준 바닷가 주변 황야라고 불리는 곳에 위치한 농가에서 산다. 그리고 그 농가 주변의 절벽에 시몽과의 은신처를 만든다. 클레르에게는 남동생인 폴이 있다. 클레르와 폴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양친 부모를 잃었다. 이들은 친척들의 손에 맡겨져 컸고, 어린 시절을 함께 하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여느 남매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달라 보인다. 폴은 누나를 찾았다가 근처 성당의 신부 장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동성이지만 서로에게 이끌린다. 클레르의 딸 질뤼에트는 나중에 갑작스레 등장한다. 쥘리에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떠났던 클레르는 쥘리에트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쥘리에트 또한 클레르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소설의 어느 시점인가에 시몽이 죽는다. 클레르는 그 죽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 것만 같은 상태에 빠져든다. 그렇게 클레르는 시몽과 함께 하였던 시간들을 보낸 농가에 머물며 작은 도시의 여기저기를 떠돈다.
소설의 줄거리 요약은 의미가 없다. 그저 소설 속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 독자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주 꼼꼼하게 읽지 않는다면, 소설의 진행이 정확한 시간의 순서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 행적의 퍼즐의 한 조각이 빠져 있는 통에 종종 당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밝힌 것처럼 나는 책을 읽는내내 의식의 무중력 상태, 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에 빠져 있었고, 바로 그 상태에서는 책과 상관없이 혹은 책과 분리되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니까... 그러니 아래와 같은 정리,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내 생활은 아주 규칙적이야. 아침 9시에 파비엔에게서 우편물을 건네받으면 신문을 읽어. 11시에는 걸을 만하면 장을 보러 나가지. 그렇지 못할 땐 앙드레가 장을 보고. 아무튼 앙드레는 매일 11시에 온단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해. 그러고 나서 좀 쉬지. 2시에는 첫 번째 영화 타임이야. 그 뒤엔 정원 일을 해. 전지용 가위를 꽉 조일 만큼 손힘이 없는 탓에, 실은 그저 정원을 둘러보는 데 지나지 않는 거지만. 때로는 시들어서 보기 흉한 장미를 손으로 잡아 뜯기도 해. 그다음엔 차 마실 물을 끓이지. 므시외 라동의 전축으로 음악을 듣고. 그러면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아페리티프 시간이야. 저녁 식사를 해. 8시에는 두 번째 영화 타임이야. 그런 다음에 몸을 씻고 잔단다.” (p.52)
-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하지 못한 어떤 시간에 도달하면 나의 일상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다. 어쩌면 라동 선생님의 일상 같은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늦지 않게 하지만 규칙적이지는 않은 시간에 일어날 테고, 바깥출입은 최소화 하면서 생활 반경으로 줄여 놓을 것이다. 직접 얼굴을 대면하여 만나는 사람의 숫자도 줄일 것이고, 되도록 음성이 아닌 텍스트로만 소통할 것이다. 이미지와 소리,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매개체들을 보고 들으면서 그리고 이미지와 소리, 텍스트를 총화시킨 어떤 것들을 생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들의 몸이 서로 닿자 그녀는 즉시 열세 살 때 느꼈던 야릇한 실신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주 야릇한 경험으로, 평생을 통틀어 오직 시몽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또다시 암벽의 틈새에, 작은 골짜기에 그와 함께 있게 되자, 그의 품에 안기자, 그녀는 점점 더 커져가는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흡사 기절에 가까운, 지극히 오래된, 거의 수면보다 더 오래된 이완 상태였다...” (p.86)
- 긴 세월이 흘렀지만 되풀이되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 고 나는 믿는다. 때때로 삶에서 허기가 느껴질 때, 나는 내게 그 절정의 순간들이 되풀이되지 않아서, 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가끔은 어떤 순간, 을 향하여 억지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 바로 그 되풀이되는 절정의 순간, 이라고 믿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곧 그 순간이라는 것이 껍데기만 닮아있을 뿐, 실제로는 왜곡되고 변형되어 있다고 판단되어 실망하고는 한다.
“렌에서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캉에서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 후에 그들은 편지 쓰기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사라졌다.” (p.93)
- 올초 이사를 할 때 어린 시절에 내가 받았던 편지를 발견했다. 당연히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 편지를 버렸고, 내 기억은 그제야 온전히 사라졌다.
“... 생활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담배였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갈 때면 누나가 부탁하는 오직 한 가지는 연한 빛깔의 외국산 담배 몇 보루였다. 담배가 외국산이고, 낯설고, 미지의 것이고, 예측이 불가하고, 메스껍고 그럴싸하지 않고, 이상야릇할수록 누나는 더욱 행복해졌다... 우리 누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pp.122~123)
- 소설 속 클레르의 캐릭터는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과도 같다. 그나마 위와 같은 문장들이 클레르를 명확하게 만든다. 조금 알 것 같지만, 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릴 때, 누나-나보다 다섯 살 위였다-에게서 내가 유난히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집중력이었다. 별안간 누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이 세계와의 접속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 돌입한 것이었다. 어릴 때 나는, 누나가 누구의 말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누나는 평생 그렇게 살았다.” (p.153)
- 누군가를 알아채는 일은 언제나 힘겹다. 지금까지 나는 누군가를 알아차리는 데 힘을 쓰지 않는다, 라는 나름의 철학 같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놓기는 하지만 그것을 그 누군가를 알아채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대방의 관찰을 통한 자료들을 계속 모아 놓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평생 그 자료들을 껴안고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힘겹고 싶지 않다.
“... 그녀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추억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웠던 것의 살아 있는 추억이다. 삶은 이 세계를 만들어낸 시간의 가장 감동적인 추억이다.’” (p.191)
- 다른 사람이 느낄 정도의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혼잣말도 잘 하고, 잠꼬대도 잘 한다. 아내의 혼잣말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진짜 혼잣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몇몇 혼잣말은 대상을 찾으려고 눈을 번뜩이는 혼잣말 같아서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의 혼잣말은 정말 혼잣말이어서, 나는 그 혼잣말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 그녀의 세계는 폴의 세계에서 아주 멀리 있었다. 나는 폴은 사랑했고, 남매 커플에겐 감탄했다. 둘을 결합시킨 결속 관계에 매료되었다. 하나가 무슨 짓을 해도 그로 인해 서로의 애정에 금이 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동생이나 누나나 서로의 직업, 결혼, 사직, 이혼을 통해 알게 된 어떤 허물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특히 여하한 경우에도 평가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일종의 자동적인 용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한 결속이었다. 어떤 구실이나 사건을 계기로 어떤 순간에 그렇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기원이 없는 관계였다...” (p.209)
- 작가의 말, 에 따르자면 키냐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강연 중에 이 소설 《신비한 결속》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단다. 책 속에서 ‘신비한 결속’이라는 문구가 포함된 문장은 위의 것 뿐이었다.
“클레르 므튀앵에 대한 나의 마지막 기억? 바닷가재 양어장을 에워싼 콘크리트 담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걸어가는 모습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걸었지만 걷는 것이 그녀의 고통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시몽의 죽음을 지울 수도 없었다. 걷는 것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상념에 잠기게 할 뿐이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논거가 제시된다... 걷기는 ‘곳’ 안에서 무엇의 길을 트고, 시간 안에서 무엇을 구멍 낸다. 그녀는 금작화 밭에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폴의 누나가 좀 돌았다고 했지만, 실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거였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누나는 동생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을 알고자 애쓰고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pp.219~220)
- 나이가 들어 어느 순간,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을 알고자 애쓰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음의 불구가 되어서는 안 돼, 라는 원칙을 잘 유지하기만 한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파스칼 키냐르 / 송의경 역 / 신비한 결속 (Les Solidarités Mystérieuses) / 문학과지성사 / 318쪽 / 2015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