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듯 하지만 그 속에 숨겨 놓은 이 정교한 대중성이라니...
일본의 문학상들 중 서점대상을 (근데 이걸 문학상이라고 할 수 있나...)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신뢰하는 편이다. 소설은 2014년 서점대상 2위 수상작이다. 연작소설집으로 남편을 잃은 데쓰코 그리고 아들이 죽은지 칠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는 시부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각각의 단편 소설로 만들어서 묶은 작품집이다. 저자명으로 되어 있는 기자라 이즈미는 일종의 필명인데, 부부인 이즈미 쓰토무와 메가 도키코가 공동으로 사용한다. 드라마 각본을 주로 쓰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 작품 또한 NHK에서 드라마화될 예정이라고 한다. (2014년 이야기라면 지금은 이미 방영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읽어보면 드라마로 만들어질 법 하구나 싶다.
「무무무」
"태풍이 방향을 바꿨다고는 하지만 아직 바람이 강했다. 데쓰코는 순풍을 받고 걸으며 ‘무무무’의 부모님을 생각했다. 딸을 정말로 보물(무무무의 본명인 다카라는 보물이라는 뜻이다-옮긴이)처럼 여겼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보석처럼 늘 아름답게 빛나고만 있지는 않는다. ‘무무무’를 동여맨 건 이 이름인지도 모른다.“ (p.37) ‘무무무’는 연작 소설집의 (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데쓰코 그리고 데쓰코의 시아버지인 시부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의 옆집에 살고 있는 처자이다. 항공사 승무원이었는데 하필이면 웃음을 잃는 병에 걸려서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고 (거의) 집에서만 지낸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무무무’가 아니라 데쓰코와 데쓰코의애인 이와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쓰코에게 결혼을 하자고 말하는 이와이와 그러한 이와이의 요청을 거절하는 데쓰코의 이야기이다. 어쨌든 소설은 웃지 않는 병에 걸린 ‘무무무’가 슬쩍 흘린 웃음을 발견한 데쓰코로부터 시작한다. 묘하게 얽히는 혹은 얽히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장면들, 일본 사소설의 특징이기도 하고...
「파워 스폿」
등장 인물을 공유하는 연작 소설의 재미에는 소설을 읽어가며 이들의 관계망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는 점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데쓰코의 남편이자 시부의 아들인 가즈키는 사실 어린 시절 다카라(그러니까 첫번째 소설에서 ‘무무무’라고 불리웠던)와 친구였다. 그리고 (그러니까 칠년 전) 다카라는 가즈키가 암으로 입원해 있는 병동에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그리고 나중에 그녀의 부모를 통하여 가즈키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모님 댁에 머물며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동창 시카이를 만나게 된다. 그는 ‘심각한 증상의 환자 앞에서도 자꾸 웃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그리고 이제 ‘웃는 법을 잊어버린 승무원’이었던 다카라와 함께 교통사고로 ‘무릎을 꿇지 못하는 승려’밖에 될 수 없어서 부모님의 절을 물려 받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시카이는 셋이 함께 파워 스폿(Power Spot), 그러니까 ‘자연의 영험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장소’에 가볼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건 소설의 초반에 배치된 이야기일 뿐, 실제 소설은 이 다카라가 죽은 가즈키에게 오래 전 선물했던 액세서리를 돌려받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음, 그러니까 대략 소설의 얼개들이 모두 이런 식인가...
「등산녀」
시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다. 등산붐에 따라 자신도 등산을 해볼까 한다는 시부에게 데쓰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등산녀 오가와 사토코를 소개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등산을 하게 되는데, 내려오는 길 시부에게 문제가 생겨 잠시 위기 상황을 겪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시부는 자신의 죽은 아내 유코를 떠올린다. 자신이 잠시 파친코에 빠져 있던 젊은 날, 유코는 시부의 손에 칼을 쥐어주며 자신을 찌르라고 한 적이 있다. 시부는 그때 이후 도박에서 손을 뗐고, 시부는 등산녀 오가와 사토코의 흰 목을 보며 그때 뒤돌아 등을 보이던 유코의 목을 떠올렸고, 다시 힘을 내어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게 된다.
「도라오」
죽은 가즈키의 사촌인 도라오가 등장한다. 도라오는 가즈키가 죽은 후 가즈키의 차를 물려 받았다. 데쓰코도 시부도 면허증이 없는 탓에 이들에게는 무용지물인 물건이었다. 물론 오래 된 차였던 탓에 도라오에게도 큰 소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라오는 가즈키와 관련한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그 차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지금 도라오는 결혼을 하기로 한 오짱과 집을 얻는 과정에서 이 차 때문에 다투고 있다. 오짱의 뜻에 따라 이 차를 처분해야만 할까, 고민하는 그때 데쓰코로부터 요청이 온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즈키의 뼈 몇 조각을 납골 항아리에 다시 넣을 작정인데,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도라오는 데쓰코 그리고 뼈를 돌려 놓는 과정을 도와줄 승려(그러니까 무릎을 꿇지 못하는 이전 소설에 등장하는 데쓰코의 친구인 후카쓰)와 함께 가즈키의 무덤을 찾아간다.
「마법의 카드」
데쓰코의 남자 친구인 이와이에게 일어난 사기 사건에 대한 소설이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데쓰코는 어느 날 이와이가 결혼 사기를 당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결혼 사기와는 거리가 멀다. 자살을 하려는 소녀를 구하면서 그 소녀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 준 것이다. 그리고 데쓰코는 이제 그 여학생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파친고에 빠졌던 시부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폐점 시간의 홀에선 촬촬촬 하고 강물 흐르는 소리가 끝없이 들린단다. 화려한 빛과 음악이 멈추면, 기계 속에선 구슬 흘러가는 소리만 들리지. 뭐야, 내가 이렇게 살벌한 곳에 있었나? 산다는 게 사실은 그런 건지도 몰라. 실제로 살벌해. 모두 그걸 알기 때문에 예쁘게 치장을 하고, 맛있는 걸 먹고, 같이 웃는 날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 아닐까? 이런 군더더기가 없다면, 사람은 외롭고 쓸쓸해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p.152)
「유코」
오래 전에 죽은 시부의 아내 유코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유코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친한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 누군가가 죽기 일주일쯤 전부터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 누군가가 죽게 되면 그 순간 눈물을 멈추게 된다. 이런 탓에 유코는 누군가와 사귈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일기 예보관이었던 시부를 만났고, 시부와 결혼하였고, 가즈키를 낳았다. 그리고 유코의 능력은 사라졌다. 그리고 병에 걸려 시부와 가즈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오래전 시부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떠올린다. “이 세상,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 괜찮아.” (p.190)
「남자들끼리」
며느리인 데쓰코의 남자 친구인 이와이와 시부의 이야기이다. 사기를 당한 시부와 그런 사실이 창피하여 데쓰코와 함께 사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와이에게로 피란을 온 시부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이와이의 집으로 피란을 가는 시부, 시부의 집으로 와서 밤을 보내는 이와이, 데쓰코의 가출에 함께 대응하는 이와이와 시부, 이들의 관계에는 긴장감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여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이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을 때 하는 시부의 말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은 변해. 어떻게 보면 그것만큼 가혹한 사실도 없지. 하지만 변한다는 사실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봐.” (p.222)
「가즈키」
사실 연작 소설의 중심에는 가즈키라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이 가즈키는 이미 죽고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읽느내낸 더더욱 마음이 쓰였다고나 할가. 이러한 가즈키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연작 소설집의 맨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굉장히 영리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소설에 가즈키와 데쓰코의 첫만남이 그 실루엣이 어렴풋하게 등장한다. 소녀였던 데쓰코의 말 ‘어젯밤 카레’, 소녀가 안고 있는 빵을 보며 답한 가즈키의 말 ‘내일의 빵’, 어쩌면 그것이 이 모든 소설의 단초라고 생각하니 가벼움 속에서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아, 이 (어설픈 듯 하지만 그 속에 감춰놓고 있는) 정교한 대중성...
기자라 이즈미 / 이수미 역 / 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昨夜のカレ-,明日のパン) / 은행나무 / 237쪽 / 2015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