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소설 속 듬성듬성한 시간을 채워야 하는, 거부할 수 없는 독자의 책무..

by 우주에부는바람

작가에 의하여 소설 내내 끊임없이 묘사되는 주변의 풍광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인물들, 그러한 인물들의 작은 움직임들을 따라가는 시선이 소설에 있다. 그 시선은 무척 내밀하지만 그렇다고 그 내밀함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바라보고, 그 바라본 것을 우리에게 그저 말할 뿐이다. 하지만 그 감응은 쉽게 다가오지 않지만 (제대로 몰입하여 읽어야 한다) 금세 사라지지도 않는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어리 소녀들인 새비서와 이디스는 흔하지 않은 장난을 친다. 그 장난의 희생양이 된 것은 새비서를 맡아 키우고 있는 할아버지네 집의 가정부 조해너이다. 조해너는 새비서의 아버지인 캔 부드로 씨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지를 주고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비서의 친구 이디스가 캔 부드로 씨를 대신하는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말이다. “... 새비서가 알려준 놀이라고는 딱 하나, 종이에 남자 애 이름과 자기 이름을 적고는 서로 같은 철자를 지워버린 다음, 남은 글자 수에 맞춰 손가락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차례로 말하면서 세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숫자에 딱 걸리는 단어가 그 남자 애와 나 사이의 운명이라면서.” (pp.42~43) 그리고 조해너는 새비서의 아버지가 있다는 그곳을 무작정 찾아간다, 편지에 적힌 몇몇 문구가 품은 의미를 따라서... 앨리스 먼로가 풀어내는 놀라운 이야기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우리들 삶에 생기는 작은 자국들을 놓치지 않고, 그 자국을 따라 주욱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를 놀라게 한다. 소설 속 이디스가 번역하는 라틴어 문구(“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를......”(pp.77~78))가 새삼스럽게 다가선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 앞에서는 더욱더...


「물 위의 다리」

소설은 '어느 날인가 그녀가 그를 떠난 적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남편인 닐과 아내인 지니 부부의 이야기이니 여기서 그녀는 지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순간 그녀가 그를 떠난 적이 꼭 한 번만 있었던 것인지 의문스럽기는 하다. 앨리스 먼로의 이런 전개 방식이 좋다. 작가의 소설은 단편임에도 집중해서 들여다보기를 강요하는데, 이런 강요가 싫지 않은 것이다. 여하튼, 소설에서 그들은 집에서 일할 소녀 헬렌을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헬렌의 동생 루이스를 맡고 있는 집에 들르게 되고, 그곳에서 지니는 매트를 만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갑판인가요? ... 다리예요. 물 위에 뜬 다리... 다리 밑의 가벼운 진동을 느끼면서 그녀는 저 나무들과 갈대밭이 모두 납작한 접시 같은 지구 위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접시 밑은 온통 물이고, 이 다리는 그 물 위에 떠다니는 지구의 끈 같은 것이라고. 물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물 위에 뜬 별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것들이 반짝거리고 이지러졌다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이내 그 자리에 다른 별이 떠오르곤 한다는 걸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p.116~117) 닐이 그 집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지니를 차에 태우고 매트가 운전해서 가게 된 그곳 ’물 위의 다리‘, 그리고 그곳에서의 짧은 키스가 전부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어머니의 가구」

아버지의 사촌인 앨프리다와 나의 이야기이다. 앨프리다의 캐릭터는 동중정이라고 할만하다. 그녀는 엄한 부모를 둔 나에게 살짝살짝 바람을 불어넣는 존재였고, 그 이후에는 나애게서 잊혀져간 존재였으며, 그러다 어느 순간 성인이 된 내게 뭔가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뭔가가 일어났다. 머릿속에서 이 말을 낚아채기 위해 탁 하고 덫이 내려진 것만 같았다. 내가 이 말들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말들이 나를 꽉 조였다가 바로 풀어주면서 오직 나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공기를 호흡하게 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p.152) 그리고 나는 소설가가 되었고 앨프리다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저 앨프리다가 나를 ‘차가운 물고기 같은 인간’이라고 칭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이다.


「위안」

‘니나가 밖에 있는 동안 루이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살해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한 부부인 니나아 루이스, 니나는 불치의 병에 걸린 남편 루이스의 선택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동의하기도 하였지만 너무 급작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그 답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루이스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나 자기혐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다가왔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이 왔다는 걸 알아차리는 거라고 그녀에게 이미 말했던 것이다. 아마 조만간 그 순간이 오리라는 암시와 함께.” (p.168) 이 모든 일이 소설의 초반부에 일어난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싶을 때 이제 루이스에게 벌어졌던 일이 서술되기 시작한다. 과학 교사였던 루이스는 창조론을 언급해달라는 학부모의 요구에 불응하다 선생 노릇을 그만두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게릭 병에 걸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죽었고 니나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니나는 장의 절차를 진행하는 에드에 의해 위안을 받고, 영혼을 믿는 에드에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분법을 받아들이지도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으면서,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한 쪽을 마냥 편들지도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근사하게 깊이 있으며 우아한 이런 소설이라니...


「쐐기풀」

어린 시절의 마이크와 나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오누이 같은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나에게 마이크는 ‘나는 그를 존경하고 보조했으며 그는 언제든 나를 지휘하고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이크는 떠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친구 서니의 집에서 우연히 마이크와 조우하였다. 나는 이제 어리지 않지만, 마이크에게 다시 속하고 싶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골프 코스에 갔다가 폭우 탓에 숲으로 숨어들고, 그곳에서 나는 마이크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쐐기풀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생채기를 입는다. 그러나 그것은 쐐기풀은 아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포스트앤드빔」

로너와 브렌던이 살고 있는 곳에 사촌인 폴리가 찾아온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브렌던과 결혼하면서 로너는 가족들이 있는 고장을 떠났다. 로너는 이제 자신의 가족들과는 조금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가족들을 간혹 그리워하지만 현재의 생활을 생각하면 그곳으로 돌아간다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이제 그 가족들의 일원이었던 폴리가 찾아와 그들 가족에게 섞여 들려 한다. 하지만 로너는 그녀를 받아들이거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결정권이 없다. 그녀는 브렌던과 결혼을 하는 순간, 가족들을 떠나는 순간 어떤 거래를 한 것이고, 그녀는 ‘그 거래의 의미’를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기억」

메리얼과 피에르는 피에르의 친구인 요나스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메리얼은 장례식에 참석한 김에 그곳 근처에 있는 요양소의 뮤리얼 이모에게 들른다. 그리고 그 여정에 남편인 피에르 대신 요나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한 의사가 동참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의 공원에서 그녀는 말한다. “어딘가 다른 데로 데려가 주세요.” 그리고 그가 대답한다. “알았어요.” 두 사람은 의사가 아는 한 아파트로 간다. 그리고 어두워질 무렵 다시 애초의 장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 남자와의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내기로 한다. 그리고 두 가지를 예상하는데,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혼 생활이 계속되리라는 것, 그리고 이 의사 어셔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메리얼의 예상은 두 가지 모두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피에르가 죽고 난 이후 나는 그 남자와의 기억들 중 ‘사소한 기억’ 한 가지를 떠올린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순간의 키스와 관련된...


「퀴니」

이복 누이인 퀴니와 함께 하였던 며칠 동안 내가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하여 작가는 말하고 있다. 옆집 아저씨였던 보길라, 보길라 씨의 아내를 병간호 하였던 퀴니는 보길라 씨의 아내가 죽고 얼마 후 보길라 씨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퀴니와 보길라 씨는 부부이고, 그들이 함께 사는 집에 내가 왔다. 음악을 가르치거나 연주하는 고상한 보길라 씨와 퀴니의 어정쩡한 관계를 나는 옆에서 지켜 보았다. 그 여름 내가 집을 떠나 토론토의 이 두 사람과 함께 지냈던 얼마간 이후 나는 다시는 퀴니를 보지 못했다. 퀴니는 보길라에서 도망쳤고 다시는 누구 앞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곰이 산을 넘어오다」

피오나와 그랜트는 아주 오래된 부부이다. 아름답고 인기도 많았으며 세련된 집안의 처녀이기도 했던 젊은 시절의 피오나는 그랜트를 선택했다. 그랜트와 피오나는 오랜 시간 부부로 잘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피오나에게 치매가 생겼다. 피오나는 모든 것을 조금씩 잊어가는 중이다. 그랜트는 결국 피오나를 적당한 요양 기관에 입원시킨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곳을 방문하면 안 된다는 규칙을 지켜) 한 달 후 다시 그곳을 찾는다. 그런데 피오나에게 오브리라는 새 친구가 생겼다. 그랜트는 피오나가 이제 그랜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희미하게만 떠올릴 뿐이고, 새로 생긴 친구인 오브리에게 집중하는 것을 처연히 지켜본다. 피오나는 평생을 함께 한 남편 그랜트를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어요. 오늘은 못 알아봤을 수도 있죠. 그러나 내일은 알 수도 있고요. 정말이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아시지 않아요? 상태가 계속해서 달라지지만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한동안 오가다 보면 그런 상황들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도요. 그날그날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해요.” (p.396) 그곳의 간호사는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을 따름이다. 소설은 2007년 개봉된 영화 <Away from Her>의 원작이기도 하다. 오래된 부부의 사랑을 이토록 유니크한 슬픔 안에서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은 소설이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에는 오랜 친구이거나 부부이거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관계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단편 소설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시간은 무척 길다. (성큼 시간을 건너뛰기는 하지만) 주로 한 사람의 생애가 길게 담겨져 있다. 다른 작가가 이렇게 하였다면 무책임하다는 핀잔을 받았음에 틀림없지만 앨리스 먼로에게는 그럴 수 없다. 그 듬성듬성한 시간을 채워야 할 막중한 책무를 독자들에게 오롯이 전가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앨리스 먼로 / 서정은 역 /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Hateship, Friendship, Courtship, Loveship, Marrage) / 문학에디션뿔 / 200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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