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한대앞 작은 지하 술집으로부터 출발한 기억...
“... 진보문학회. 집단창작을 하겠다며 모인 친구들 중 몇은 빠지고 다른 동기와 후배들을 모아 만들었다. 당시 인기였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세미나도 하고, 글을 담아 문집도 만들고 꽤 활발하게 활동했다. 단지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문학운동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니 연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S와 몇 명이 주도적으로 서울과 전국의 다른 문학회들을 모아 연대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켜보기만 했다. 그건 나에게 맞는 것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p.206)
1990년대 초였고 겨울이었다. 한양대학교 정문 앞의 작은 지하 술집에 서울의 여러 대학 문학회 사람들이 모였다. 서울지역대학생문학연합, 이라는 조직의 일원들이었고, 아마도 송년회 자리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저자인 김봉석 형을 만난 적이 있다. 학생이었던 우리들보다 조금 프로페셔널 한 글쓰기를 시작한 상태였을 수 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다는 바램이 있었으므로, 어눌한 그의 태도까지 마음에 들었다. 첫 만남이었지만 무엇엔가 의기투합이 되었던 것도 같다. 그 후 한두 차례나 더 대면을 한 것이 다였지만 오래 기억에 남았고, 몇몇 매체에 실린 그의 글을 눈여겨보았던 것을 보면...
“... 그녀가 말했다. 글을 써보라고. 글을 잘 쓴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그런가? 글을 써 볼까?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라도 해 볼까, 라고... 그래서 무작정 글을 썼다. 연애편지를 쓰고, 잡기장에 쓴 글을 본 누군가의 청탁으로 학생회지에 쓰게 되고, 그러다 보니 교지와 학교 신문에도 쓰게 되었다. 수필도 쓰고, 책이나 노래극 리뷰도 쓰고, 영화 평론도 쓰게 되었다. 주어지는 대로 모든 것을, 쓰게 되었다. 그러다 글을 쓰겠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문학회를 만들고, 졸업 후 문화운동 판에도 잠시 뛰어들고, 이러니저러니 하다가 글 쓰는 일로 벌어먹게 되었다. 그녀 덕분이었다.” (p.180)
어쩌면 그 겨울 그 자리에서 저자가 내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이들의 투신 동기란 것이 다들 대단치 않으니 너도 써보라고, 나도 어떤 그녀가 던진 작은 불씨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모든 불씨가, 그 불씨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고 불씨가 없었겠는가만 저자는 글을 쓰고, 나는 지금 그 글을 읽고 있다.
“... 음악은 좋았다. 누구나 듣게 되는 비틀즈, 딥 퍼플,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등으로 출발하여 <월간 팝송>을 탐독하며 기사에 나왔던 수많은 뮤지션의 음반을 부지런히 들었다... 후일의 이야기를 한다면 내 음악 취향은 가요, 재즈와 블루스, 포크, 아트 락, 제이팝과 가요, 월드 뮤직 등을 전전하지만 딱히 하나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p.120)
어쩌면 그날 우리는 <월간 팝송>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함께.... 당시의 분위기에서, 그것도 문화운동을 하고자 만든 조직의 송년회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3, 4년 정도의 터울이 남에도 불구하고, 술집 구석진 자리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눴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들을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목소리를 낮췄을 것이다.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친밀감의 정체는 그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평론가로 활동하지만 나는 이론이나 분석 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재미있게 보았거나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 왜 그런지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작품과 작품들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나 차이, 미묘하게 걸쳐 있는 정서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은 세간에서 주로 ‘오락’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액션, 공포, SF, 범죄, 어드벤처, 무협 장르의 영화, 만화, 소설 등. 무엇을 더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딱히 없다. 걸작이면 다 재미있고, 나 역시 졸작이라고 인정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옹호하고 그 의미와 필요, 탁월함에 대해 그동안 말해오며 살아왔다...” (pp.11~12)
그리고 그는 평론가가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이론가 타입의 평론가는 아니다. 그는 평론가라기보다는 대중문화 전반을 다루는 칼럼니스트에 가깝다. 아직까지도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호기심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키덜트와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책에 실린 그의 유년기를 살펴보면 그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써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또 그렇게 쓰게 되리라, 여겨진다.
“초상현상이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위반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과 회의가 나는 너무나도 즐겁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배운 모든 것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이, 내가 아는 세상이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기를 원한다. 흔들고 뒤집어버린 후에도 남는 것이 진짜 지식이고, 이 세계의 진짜 얼굴이라고 믿는다...” (p.133)
그해 겨울로부터 이십여 년의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당시의 모임이 어쩌면 그 엽합체의 마지막 송년회였던 것 같다. 언제까지 그 조직의 명맥이 유지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한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다 믿고 싶었지만 문학을 하겠다는 우리는 대체로 회의주의자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아직 회의주의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 짐작한다. 그런데 그날, 술집을 나설 때 흰 눈이 날리고 있었던 것도 같은데...
김봉석 /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 북극곰 / 2015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