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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미 《뉴요커》

저기 먼 도시에 머무는 친구가 들려주는 듯 순하고 담담한 예술 이야기..

by 우주에부는바람

이 작가의 문장이 순하고 좋아서 연거푸 세 권째 읽고 있다. 역순으로 읽었고, 이 책이 가장 오래 전에 (그러니까 2004년에, 그리고 《취향》은 2008년, 《나의 사적인 도시》는 2015년에) 출판되었다. 그런데도 이미 이때부터 문장이 차분하고 깔끔하다.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뉴욕이라는 외딴 곳, 그곳의 한 켠에 스며들어 지낸 이력을 지닌 사람의 글이라면, 그리고 그곳이 바로 뉴욕이라면 어딘가 격정과 혼잡이 묻어 있을 것이란 선입견을 갖게도 되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산문가이자 시인이었던 E.B.화이트의 「여기는 뉴욕」에 따르면 뉴요커에는 세 부류가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 뉴요커’, 다른 곳에서 살면서 뉴욕으로 출퇴근을 하는 ‘통근 뉴요커’, 그리고 다른 곳에서 태어나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뉴욕으로 온 ‘정착 뉴요커’. 통근 뉴요커는 뉴욕에 끊임없는 흐름을 가져다주고, 토박이 뉴요커는 견고한 토대와 연속성을, 정착 뉴요커는 도시에 열정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화이트는 이 세 번째 뉴요커들이야말로 뉴욕 특유의 긴장감을 부여해주고, 이들로 인해 뉴욕은 시적인 도시가 될 수 이으며, 다른 도시들이 넘보지 못하는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낸 도시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디서 왔건 그건 상관이 없다고 화이트는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첫사랑과 같은 강렬함으로 뉴욕을 끌어안는 사람들이라고.” (p.25)

이 책은 그러니까 위의 분류에 따르자면 ‘정착 뉴요커’에 속하는 저자가 (지금은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렇게 ‘뉴요커’로 살아가면서 눈에 담은 것 그리고 마음에 품은 것들을 적어내는 책이다. 그렇지만 ‘뉴요커’는 ‘뉴요커’여서 (왠지 뉴요커하면 쿨하고 시니컬한 인상이 있지 않은가) 무엇을 보고 크게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고, 마음에 꼭 품고자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오히려 뉴욕의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두고 온 것들을 상기할 때야 조금 흔들린다. 그렇게 홍대 앞 ‘계단집’이 나오는 순간 나 또한 푸훗, 흔들리고 만다. 학교 앞에 있던 그곳에서 먹었던 600원인가 800원인가 하던 냉면이 떠오른다. 학창 시절 그곳에서 먹는 냉면은 일종의 사치가 아니었던가. 더불어 그곳에서 낮술을 마시다가 그예 시작된 데모에 갇혀, 투석전을 대비하여 양철문을 덧댄 그곳 계단집의 어두운 구석 자리에서 마시던 소주 한 잔도 함께 떠오르고...

“계단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야망으로 발전하였고, 나는 급기야 완벽한 계단을 꿈꾸게 되었다.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어졌다. ‘완벽한 계단’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머릿속에 자리잡자, 제일 먼저 떠오른 계단이 있다. 홍대 앞에 있던 ‘계단집’. 계란말이로 유명했던 그 집의 이름을 처음에 들었을 때 난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이층이나 삼층에 있을 것이라 상상했었다. 홍대 정문 앞에서 길을 건너기 위해 서 있던 나의 눈에 ‘계단집’이라 쓰여진 간판이 포착되었을 때, 그 앞에 놓인 계단의 수는 단 세 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매끈하지 않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p.228)

69년생인 작가와 같은 해 태어났다. 그러다보니 우연찮게 겹치는 공간이 생긴다. 유행 사조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하였던 딜레탕트의 속성 탓에 저자가 다루는 작가들 또한 아예 낯설지는 않다. 한 시절을 함께 하였던 친구가 먼 여행지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같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풀어내는 경험담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밤이 지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친구가 좋은 이유는, 친구와 나 사이에 비평이 사라진 공간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간 속에선 단점이 있어도 잘 보이지 않고, 혹 보이더라도 기꺼이 사사삭 덮어줄 수 있는 순한 공기가 채워져 있기에 자꾸 그 공간 속에 머무르고 싶어지는 것이리라...” (p.235)

책을 읽다가 ‘서울러’, 이런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 친구가 ‘뉴요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서울에서 살고 있는 ‘서울러’의 반격 정도를 생각했다고나 할까... 이 거대 도시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토착과 통근과 정착으로 나누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 ‘서울러’들의 통합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어떤 특징을 떠올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태 신생新生이다.


박상미 / 뉴요커 :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 / 마음산책 / 292쪽 / 20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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